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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전경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 발견한 곳이 지금의 선교장이다.ⓒ 김종길

강릉 하면 율곡 이이와 교산 허균을, 그리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여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릉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여인, 권씨 부인이 있다. 권씨 부인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십세손으로 충주에 사는 이주화에게 시집갔다. 그러다 1718년(숙종 44)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마치고 이내번과 이태번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강릉으로 돌아왔다.
 
권씨 부인은 경포대가 있는 북촌 저동에 자리 잡았다. 친정인 오죽헌이 가까워서였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친정으로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아들이 없자 네 번째 사위인 권화에게 물려주었다. 권화는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이다. 권화의 아들 권처균은 자신의 호인 오죽헌을 당호로 썼고, 이때부터 이곳은 안동 권씨의 종가가 됐다. 권씨 부인은 바로 권화의 고손자인 권시흥의 딸이었다.
 
오죽헌 이내번의 어머니 권씨 부인의 친정이 오죽헌이다.ⓒ 김종길
 
권씨 부인은 강릉에 정착하여 아들 이내번과 염전을 경영하여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댁이 있던 충주는 내륙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이때 권씨 부인은 소금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이를 기반으로 아들 이내번이 상당한 규모의 전답을 사들였다. 경제적 기반을 쌓은 이내번은 어머니 권씨 부인이 1751년에 별세하자 더 넓은 새로운 집터를 배다리골에 마련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선교장이다. 그러니 선교장은 권씨 부인에 의해 시작된 셈이다.
 
선교장(船橋莊)은 옛날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집 앞까지 배를 타고 건너다닌다 하여 '배다리집'이라 이름 했다. 선교장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양반 상류주택으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인 살림집이다. 집 이름에 장(莊)이 붙었으니 여느 집과 달리 장원이라는 의미라는 걸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민간 주택은 99칸이 한도였는데, 선교장은 120여 칸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족제비 떼가 인도한 하늘이 내린 명당
 
선교장 전경 선교장은 120여 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조선을 대표하는 양반 상류주택이다.ⓒ 김종길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강릉의 여덟 명당 가운데 선교장 집터를 찾고 있었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내번이 좀 더 너른 집터를 찾던 어느 날,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에는 떼를 이루어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이내번은 그 뒤를 쫓았는데 어느 야산의 솔숲에서 그 많던 족제비 무리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망연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던 이내번은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명당이라고 무릎을 쳤다."
 
이때가 1756년(영조 32) 6월 28일이었다. 이내번은 후사가 없어 형인 이중번의 둘째아들 이시춘을 입양했으나 선교장을 물려받은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선교장의 주인은 당시 불과 열세 살에 불과했던 손자 이후에게 넘어갔다. 이후는 비록 어렸지만 일찌감치 할아버지로부터 경영 수업을 받아서 선교장을 만석꾼으로 키워 대장원으로 바꾸었다.   
 
활래정 이후가 집 앞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운 것이 활래정의 시작이었다.ⓒ 김종길
 
오은(鰲隱) 이후(李厚, 1773~1832)는 영동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주문진과 양양, 남쪽으로는 삼척과 울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농토를 소유했다. 그는 시험관의 횡포로 과거에 낙방하자 초야에 묻혀 학문과 풍류를 즐기는 은일지사로 살았다. 그리하여 이후는 집 앞 배다리골 입구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다. 1816년(순조 16)의 일이었다. 이것이 지금의 활래정의 시작이다.
 
이후가 처음 활래정을 지었을 때는 지금과는 달랐다. 이후의 증손자인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가 활래정을 중건한 후 직접 쓴 <활래정 중수기>를 보면 이후 당시의 정자는 소박하다 못해 누추했다. 이때만 해도 활래정은 연못 가운데 섬에 지은 단칸의 소박한 정자였다. 겨우 한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작았고, 널빤지로 다리를 만들어 정자를 오갔다고 한다.
 
활래정 전경 활래정은 처음 연못 가운데 섬에 지은 단칸의 정자였으나 이근우가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 김종길
 
지금의 모습은 선교장의 전성기를 이뤄낸 이후의 증손자인 이근우가 다시 지은 것이다. 이근우는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본떠서 지금의 자리에 활래정을 중건하고 전국의 풍류객들과 교유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선교장을 방문하여 시(詩,) 서(書,) 화(畵)를 남겼다. 그리하여 활래정은 전국에서 모여든 풍류객들로 선교장의 멋과 풍류를 상징하는 대표 공간이 됐다.
 
이후의 호는 오은인데, 오은(鰲隱)은 '숨어 있는 자라'라는 뜻이다. 바다의 삼신산을 숨어서 떠받치고 있는 자라와 같은 존재라는 상징이다. 선교장은 풍수상 팔방수(八方水, 여러 방향에서 오는 물)가 모여드는 연못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입구에 연못을 파고 봉래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어 시인묵객들을 모아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정자
 
활래정 활래정은 여름이면 백일홍과 연꽃이 만발하여 선계를 연상시킨다.ⓒ 김종길
 
활래정은 중국 주자(朱子)의 시에서 가져왔다. 이후도 조선의 유학자들처럼 주자를 흠모했다. 그래서 정자 이름을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인용하여 활래정(活來亭)이라 했다.
 
"작은 연못이 거울처럼 펼쳐져 / 하늘빛과 구름그림자가 함께 어리네 / 묻노니 저 물은 어찌 그리도 맑은가 /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일세(爲有源頭活水來)."

실제로 활래정은 태장봉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인 활수가 흘러들어오는 정자'이다.
 
활래정은 얼핏 봐도 그 자태가 화려하다. 민간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정자가 아닌 왕실의 품격이 넘쳐 보인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닮은 정자는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담그고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마치 은둔하는 선비가 발을 씻는 모습 같다.
  
활래정 활래정은 은둔하는 선비가 발을 씻는 모습으로 연못에 네 돌기둥을 담그고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김종길
 
정자는 ㄱ자 형이고, 연못은 방형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네모난 섬이 있으니 방지방도인 셈이다. 활래정은 온돌방과 마루, 다실로 구성되어 있다. 언덕 쪽에는 온돌방을, 연못 쪽에는 누마루를, 그 사이에는 다실을 두어 손님을 접대할 차를 끓인다. 이 공간은 작은 복도로 연결된다. 특이한 건 활래정엔 벽이 없다는 것. 문으로만 둘러져 있어 모두 열어 놓으면 방안 가득히 주변 자연이 들어온다. 폐쇄적인 선교장에 비해 활래정은 그만큼 개방적인 공간이다.
 
선교장은 문화예술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목이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전국의 명사들을 모여들게 했다.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여행에 필요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활래정은 전국에서 모인 풍류객들에게 최고의 풍류 공간이 됐다. 연회가 벌어졌고 그 감동은 시, 서, 화로 남아 정자 곳곳에 걸렸다. 선교장에는 외부 손님을 위한 활래정뿐만 아니라 주인과 가족을 위한 녹야원과 팔각정, 경포호를 감상할 수 있는 별서인 방해정 등 풍류와 은일한 삶을 사는 공간이 더 있었다.
     
달빛이 내리는 문
      
선교유거 소남 이희수가 쓴 선교유거.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으로 선교장을 드나드는 솟을대문으로 기품 있는 문이다.ⓒ 김종길
 
선교장에는 모두 열두 개의 문이 있다. 그중 가장 기품 있는 문을 꼽으라면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이다.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장 운치 있는 문은? 바로 배다리골 입구의 상징이자 활래정의 출입문인 월하문(月下門)이다. '달빛이 내리는 문'이다. 그런데 월하문은 좌우에 그 흔한 담장도 행랑채도 없이 홀로 우뚝 서 있다. 그리고 늘 열려 있다.
 
월하문 문기둥에는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월하문'은 가도의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에서 빌려 왔다.
 
"한가로이 사니 이웃 드물고 / 풀숲 오솔길은 황폐한 마당으로 들어가네 / 새들은 연못가 나무에서 자고 /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활래정과 월하문(오른쪽) 월하문은 활래정을 출입하는 문으로 기둥에는 가도의 시가 주련으로 걸려 있는 운치 있는 문이다.ⓒ 김종길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월하문의 의미는 '달이 뜨는 늦은 밤이라도 이곳을 찾는다면 문을 두드려라'라는 뜻일 게다. 이 시는 그 유명한 '퇴고(推敲)'의 일화를 남긴 시다.

시인 가도는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에서 '두드린다(敲)'가 좋을지 '민다(推)'가 좋을지 고민하며 당나귀를 타고 가던 중에 당대의 대문장가 한유를 만나게 된다. 한유는 가도의 사연을 듣고 '민다'보다는 '두드린다'가 낫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시는 '두드린다'가 됐다. 그 인연으로 둘은 벗이 됐고 이때부터 원고를 교정하는 것을 '퇴고'라 했다.
 
활래정 활래정은 다실을 가지고 있는 다정으로, 문을 활짝 열면 사방 풍경이 들어온다.ⓒ 김종길
 
활래정은 다실을 가지고 있는 다정(茶亭)이기도 했다. 다실에서 우려낸 차를 손님에게 접대하며 풍류를 즐겼다. 주로 연꽃차였다. 꽃잎이 오므라드는 저녁에 모시 주머니에 싼 찻잎을 넣어 두면 밤새 연꽃 향기가 찻잎에 배어들었다. 아침에 꽃잎이 열리면 주머니를 꺼내 차를 달였다. 이 연꽃차와 함께 선교장에선 흑임자, 오미자, 송화가루, 인삼가루, 녹말가루 등으로 만든 오색다식이 전해지고 있다.
 
선교장 일대는 사시사철 아름답다. 봄의 꽃나무와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이 모두 깃들어 있고, 겨울 설경이 퍽 인상적이다. 연못 가운데 섬에는 소나무가 서 있다. 정자에 앉아 누마루 문을 활짝 열면 연못과 섬, 소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름이면 활짝 핀 백일홍과 연꽃이 연출하는 선경을 완상할 수 있다. 방에선 동쪽으로 동산 자락을 볼 수 있으니 활래정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묘미이다.
 
활래정 활래정의 수많은 현판과 주련 들은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자아낸다.ⓒ 김종길
  
오재당 흥선대원군은 선교장의 사당인 오재당의 편액을 써 주었다.ⓒ 김종길
 
활래정의 운치를 더하는 풍경
활래정은 풍류객들이 남긴 시문들로 가득하다. 이들을 유심히 봐야 전체 면모를 낱낱이 읽을 수 있다.
 
헌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문장과 글씨, 그림에 모두 능했던 운석 조인영은 <활래정기>를 지었다(마루방에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활래정에 들러 붉은 잎으로 산에 깃들어 살겠다는 고졸한 마음을 담아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편액을 남겼다.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글씨를 남겼다. 선교장의 주인 이회숙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대원군은 선교장 사당의 당호인 '오재당(吾在堂)'이라는 편액을 써 달라는 청을 받고 써 주었다. '남추북눌(南秋北訥)'이라 하여 남쪽에는 추사 김정희, 북쪽에는 눌인 조광진이라 했다. 조광진의 제자이자 흥선대원군이 "너의 필력은 신의 힘이라 신필이다"라고 극찬했던 소남 이희수도 글씨를 남겼다. 그것이 바로 선교장 솟을대문의 현판인 '선교유거'이다. 이외에도 활래정에는 연당 반대편에 오은 이후의 시가 쓰여 있고, 왼편에는 이근우, 오른편에는 이돈의의 시가 걸려 있다.
 
활래정 현판으로는 먼저 선교장을 들어서면 연못 건너로 바로 보이는 것이 성당 김돈희의 글씨이다. 김돈희가 쓴 활래정 현판은 행서의 부채꼴 모양이 하나 더 있어 모두 둘이다. 동쪽에 있는 예서체의 생동감 넘치는 활래정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썼다. 활래정 현판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은 서예가인 규원 정병조이다. 정자 남쪽에 걸려 있는 노란 글씨의 행서체 현판과 부채꼴 모양의 파란 글씨의 예서체 현판, 횡으로 예서체로 쓴 '화중계산(畵中溪山)'이 있다. 중국 위안스카이의 서예 고문을 지낸 성재 김태석이 전서체로 쓴 활래정 현판도 있다. 남쪽에 있는 '만년에 농사를 지으며 사는 집'이라는 뜻의 '만가와(晩稼窩)'는 차강 박기정의 글씨이다.
 
현판 글씨와 더불어 활래정의 품격을 높이는 것이 기둥에 걸린 주련이다. 주련은 행서와 초서에 능했던 근대 서예가인 농천 이병희의 글씨이다. 이병희는 이근우와 사돈을 맺었는데, 선교장을 직접 방문하고 글을 써서 선교장의 풍광을 노래했다. 글씨도 글씨지만 주련은 희색 바탕에 위에는 연꽃을 아래에는 연잎을 새겨 매우 화려하다. 주련은 모두 열여덟 개이고 정자를 빙 둘러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현판이 있어 묘하게 운치를 더해준다. 주변 풍경과는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덧붙이는 글 | 강릉 선교장을 마지막으로 '김천령의 한국 정원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지난 3월에 시작해서 애초 9월에 연재를 마칠 계획이었는데, 몇 곳이 추가되는 바람에 12월에야 마치게 되었습니다. 전남 완도 보길도 부용동 원림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강릉 선교장 활래정에서 끝났습니다. 모두 16곳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답사하여 사진으로 촬영한 정원은 모두 50여 곳입니다. 나머지 정원은 이후 책에서 소개하겠습니다. 그동안 많은 응원과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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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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