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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언니가 자기 어렸을 적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일 생각나냐? 아버지가 우리 깨워서 국민교육헌장 외우게 시켰던 일."

오빠가 대답한다.

"기억나. 그 날 밤 그거 다 외우고 자느라 고생했잖아. 그게 고척동 살 때 일이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작은언니가 국민교육헌장을 외운다. 둘은 내가 모르는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는다. 고척동은 내가 네 살 때까지 살던 동네다. 그러니 내가 그 일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이야기 속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 번도 무언가를 외우라고 시킨 일이 없다.

아버지 나이 마흔하나에 엄마 나이 마흔에 내가 태어났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늦둥이다. 나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언니 오빠에 비해 적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나를 귀여워 해주시긴 했지만 말이다. 아마도 부모님은 생활에 많이 지쳤거나 아니면 자식이 부모의 기대대로 자라주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인 양 그렇게 대하셨다.

직장생활 벗어난 아버지, 언제나 위태로웠다

드라마 <가족끼리 왜이래>의 한 장면.
 드라마 <가족끼리 왜이래>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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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언니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 딱 한 번 아버지는 "네가 아나운서 시험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언니는 국어국문과를 졸업했고 부모님은 언니가 참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빠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 "경제신문사에서 신입 기자를 뽑는다고 하는데 거기 한 번 원서를 내는 게 어떠냐? 마감이 며칠 안 남았던데" 하고 딱 한 번 말씀하셨다. 물론 언니와 오빠는 아버지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쩌면 언니도 오빠도 아버지가 그 말씀을 하였던 것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우리 형제들에게 당신의 기대를 말씀하시는 걸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한 적 없다.

아버지는 열아홉 어린 나이에 홀로 월남했다. 남들은 나이를 속여서 안 가기도 하는 군대에 아버지는 먹고 살기 위해 입대한다. 전쟁을 겪으며 10년간 군에 있었다. 군에서 전역했을 때는 엄마와 결혼을 한 사이였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형편에선 벗어날 수가 없었다. 쌀이 너무 비싸 쌀밥은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큰언니를 잘 먹이지 못해서, 돌이 된 언니는 걷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리고 일이 년 뒤 아버지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직장생활을 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정리했다. 이유는 아버지 은사님의 소개로 회사를 인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진 돈이라고는 퇴직금이 전부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H 후리저' 냉장트럭 물류회사. 아버지는 회사를 공동으로 인수하고 나서 임원 자리에 올랐다. 아침이면 기사 딸린 차가 집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어린 나로서는 그게 너무 신기했다. 차가 얼마나 귀한 시절이었나? 그런데 그 호사스런 출근도 오래가지 못했다.

석유파동인가가 터졌다. 결국, 회사가 망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은사님께 사기 당한 거라 했다. 은사님이 회사에 돈 한 푼도 투자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한동안 아버지는 온종일 안방을 차지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고는 화투로 하는 운수 떼기가 전부였다. 오늘 일진이 어떤지. 그때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 옆에서 화투를 가지고 놀았다. 화투를 갖고 노는 게 너무 재미 있었다.

그런데 아무 말 안 하고 우릴 지켜보는 엄마의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화투를 가지고 놀지 않았다. 얼마 뒤 아버지도 손에서 화투를 내려놓았다. 엄마는 나중에 말했다.

"그 때 너희 아버지가 진짜 어떻게 될 줄 알았다."

아버지는 다시 일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그릇장사를 했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아버지가 팔던 그릇이 남아있다. 그때부터 자영업자로 아버지의 삶이 시작되었다. 안정된 직장생활을 벗어난 아버지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교육열, 놀라웠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작은언니가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해 가을 큰언니는 결혼했다. 그리고 다음 해엔 오빠가 대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오빠는 공부를 꽤 잘했던지라 그 유명한 S대 원서와 중위권대학 장학생이 될 수 있는 두 개의 원서를 썼다. 원서를 접수하는 마지막 날, 두 개의 원서를 가지고 아침 일찍 오빠가 집을 나섰다. 엄마는 집을 나서는 오빠를 세워선 S대에 가라고 당부를 했다. 최종 선택은 온전히 오빠만의 몫이었다.

시집간 큰언니는 오빠에게 연락이 왔는지 온종일 전화를 했다. 밤늦게 돌아온 오빠는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중위권 대학에 원서를 접수했다고 말했다. 그 날 나는 일기장에 "아버지가 퇴직금을 사기당하지만 않았어도 오빠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글을 썼다.

오빠는 결국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그만뒀다. 재수해서는 본인이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에 들어갔다. 엄마가 집에서 문방구를 하며 맞벌이를 했지만,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내 학업이나 학교 일에 관심을 가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은 다만 우리 사남매를 먹이고 입혀 키우고 또 학비를 마련해 주는 일에 집중하셨다. 사실 그것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렇게 무심한 듯 우릴 키우셨다고 알고 있었던 아버지가 밤에 자식을 불러 모아서 '국민교육헌장' 외우기를 시키는 교육열을 보였다니 나는 놀라웠다.

그런데 '국민교육헌장' 외우기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 뒤에 알게 되었다. 큰언니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아버지가 시골 학교의 육성회장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내가 가져간 가정통신문에 육성회장이 되겠다는 사인을 한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난 당연히 우리 아버지가 육성회 일원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큰언니 담임선생님과 동료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했단다. 그 바람에 언니는 운동회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아버지는 시골학교에서 극성 아버지였다. 1960년대 이야기 속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과 한참 달랐다. 그건 진짜로 내가 상상도 못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졸업식에만 참석해 주어도 감지덕지였으니까.

내가 부모님을 참 모르고 살았구나

한동안 이 괴리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고민한 적이 있다. 내가 아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알고 있는 부모님이 왜 다를까? 생각해 보니 언니 오빠와 내 경험은 다르다. 그러니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와 큰언니의 나이가 12살 차이고 작은 언니랑 오빠와는 8살가량 차이가 난다. 그러니 내가 아는 부모님은 언니 오빠가 아는 부모님보다 대략 10년은 더 나이가 든 모습이다.

언니 오빠는 부모님의 30대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지만 나는 40대 중후반의 부모님 모습에 대한 기억밖에 없다. 패기 넘치게 시골학교의 육성회장을 하며 '바짓바람' 일으키는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는 상상도 못할 모습이다.

또 밤에 자식들 불러 앉혀서 무언가를 외우게 하는 일은 내 기억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을 참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어떤 꿈을 가졌는지. 어떤 청춘을 살았는지.

막내인 내가 보는 부모님의 모습은 언니 오빠가 보는 부모님 모습보다 나이 든 모습이라 더 애처롭고 안쓰러울지도 모른다. 언니 오빠가 출가한 내 중학교 시절부터 내가 결혼할 때까지 십 년 이상을 나는 부모님과 셋이 살았다. 그동안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언니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부모님의 일을 형제들에게 알리는 건 당연히 내 임무가 되었다.

내가 결혼한 지 20년이 된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일은 내 일이다. 돌이켜보니 결혼 후 20년간 친정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산 것은 언제나 나였다. 그건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의 임무지만 부모님이 점점 늙어가는 뒷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 쉽지가 않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불효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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