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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여간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정금씨가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신정금씨는 온몸이 굳은 상태로 안구마우스를 이용해 눈을 움직여 글을 씁니다.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편집자말]
남편에게 얼마 전 다녀온 호암미술관엘 가서 그때 잠깐 2층 통유리로 아쉽게 보았던 멋진 풍광을 실컷 보고 싶고 미술품도 다시 보고 싶다 했더니 이번엔 민속촌엘 가자 했다. 이 더위에 민속촌은 내키지 않았지만 예기치 않은 추억을 기대하며 남편 뜻에 따르기로 했다. 수차례 혼자 외출 준비해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남편은 허둥대지 않고 불편도 못 느낄 정도로 능숙하게 외출 준비를 해서 장애인 택시를 불렀다.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남편은 나가서 차가 올 때까지 집주변을 산책하자 했다. 아파트 단지 안을 가볍게 산책하겠지 한 내 예상과는 달리 광교산 자락으로 이어진 샛길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봄에 활동보조 언니가 휠체어를 밀고가다 날 떨어뜨린 바로 그 샛길이었다.

남편은 가뿐하게 샛길을 빠져나가 어느새 우리집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광교산 자락 숲길로 접어들었다. 백여 미터쯤 가니 경사가 50~60도는 돼 보이는 아주대로 통하는 절벽 같은 아찔한 샛길이 나타났다.

위험을 알리는 쇠말뚝 두 개가 박혀 있었다. 설마 저 길로는 안 가겠지 하고 생각한 순간 남편은 아찔한 그 길로 갈 생각인지 "아주대 구경을 해보자"며 휠체어를 거꾸로 끌고 그 길로 접어들려 했다. 반사적으로 화살기도를 했다.

그 순간 남편은 장애인택시 예약이 생각났는지 내게 의향을 물었다. "갈까? 가지말까?" 하기에 난 강하게 가지 말자는 의사 표시를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난번 수원 화성에 다녀온 후 내가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아니면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남편은 그보다 훨씬 더한 급경사 길에 도전하려 하는 것 같았다. 난 잠시 그때 과하게 좋아했던 걸 후회했다. 

방향을 돌려 호젓하고 정겨운 산길로 접어들며 난 민속촌 대신 이 숲길에서 휴식하며 사색하고 싶어졌다.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는지 남편도 내게 의향을 물었다. 남편은 서둘러 차 예약을 취소했다.

이 길로 오게 된 게 뜻밖에 받은 귀한 선물처럼 반가웠다. 매일 거실에서 초록빛 옷을 입은 숲을 바라보며 갈 수 없는 길에 대한 동경으로 아쉬워했었는데, 이렇게 오게 되다니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감격스러워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가고 싶었다. 

움직일 수 없는 내게 숲은 차창이나 거실 창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아련한 그리움이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숲엔 제법 나이 든 소나무들이 보였다. 굽은 소나무 곁엔 상수리나무, 아카시아, 산벚나무, 밤나무, 산초나무, 단풍나무, 옻나무가 마치 천태만상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처럼 다채롭게 공생하고 있었다.

생명력 강한 칡넝쿨은 나무를 품어 안았고, 배고픈 청설모는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인다. 나무 그늘엔 지난봄 등산객의 눈을 피한 고사리가 잎을 피웠고 원추리, 구절초, 고운 보랏빛 종모양의 꽃을 피운 며느리취도 보인다. 마가렛도 수줍은 소녀같은 하얀 꽃을 피웠고 수더분한 망초꽃도 보였다. 손톱만 한 부전나비가 바쁘게 팔랑거리고 아기 손바닥만 한 제비나비도 보인다. 호젓한 곳에서 쉬어 가고 싶은 나와는 달리 남편은 무슨 극기 훈련이라도 하는 양 휠체어를 서둘러 밀고 있다. 

뻔뻔스런 마누라는 속 몰라주는 남편에게 살짝 골이 났다. 이때 반대 편에서 올라오신 7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보자마자 몇 번이나 남편에게 고맙다, 감사하단 말을 되풀이하셨다. 그분은 힘든 길에선 잠시 함께 휠체어를 밀어주시고 내게도 빨리 나으라 격려해 주시며 가던 길을 재촉하셨다.

그분이 왜 남편에게 고맙다고 하셨는지 그 마음이 전해져 나도 아쉬움으로 인한 짜증이 금세 미안함과 고마움, 가여움으로 바뀌었다. 남편은 내리막길에 있는 한적한 팔각정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동네를 설명해주고 언제 봤었는지 빨간 산딸기 가지를 꺾어와 선물이라며 내게 꽂아주며 천진하게 웃었다.
 
 선물로 받은 산딸기와 함께
 선물로 받은 산딸기와 함께
ⓒ 박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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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을 찾아 내려오니 요즘에 한창 입주 중인 호수 부근 아파트 길이었다. 호숫가에 가고 싶어 남편에게 사인을 보내도 눈치 없는 남편은 아기를 달래듯 다정하게 "이제 집에 가자" 하며 바쁘게 길을 재촉했다. 200~300m를 휠체어를 밀어 거의 집 부근까지 왔을 무렵 남편이 나를 쳐다보기에 놀이터에서 놀다 집에 가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난 남편에게 호수공원에 가보자 떼를 썼다. 남편은 "진즉 말하지 그랬어?" 하며 "아까 그 신호였어?" 하며 시계를 보더니 다시 호수로 향했다.

광교 신도시가 생기기 전 이곳이 원천유원지였을 때부터 우리 부부는 종종 이 호숫가를 드라이브하기도 했고 인근의 맛집을 찾기도 했었다. 호숫가엔 수양버들과 버드나무가 많았고 호수엔 젊은 연인들을 태운 오리배들이 한가로이 떠다녔었다. 옛 기억을 되살리며 호수를 감상하는데 그때부터 있었던 버드나무와 수양버들이 조경수들 사이에서 호수를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자리를 지켜준 나무들이 내 오랜 추억의 증거 같고 오래된 동무처럼 반갑고 고마웠다.

호숫가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쳐진 펜스가 내 시야를 방해했고, 목을 조금만 돌려 호수 쪽을 보며 가고 싶었지만 똑바로 하고 가는 탓에 눈동자를 너무 굴려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잠시 호수 전경이 보이는 곳에서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겠지 한 내 예상과 달리 우직한 남편은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쯤 걸리겠다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산죽나무와 갈대의 사촌쯤으로 보이는 이름 모를 수초들이 산들바람에 군무를 추고 있었다. 수련, 부들, 부레옥잠 등의 수생식물들이 보이고, 수련은 꽃대가 올라온 게 머지않아 꽃봉오리를 터뜨릴 것 같았다. 남편은 수련을 연꽃이라 착각하는 듯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허기가 졌다. 이 사람도 배고프겠다 싶어 마음이 짠해졌다. 나와 있을 땐 언제나 대충 먹는 남편이 애처롭다.

호수가 아이들의 물놀이장은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로 왁자지껄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유달리 물놀이를 좋아하던 큰아이와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세월 참 빠르구나!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여기에도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네" 하기에 아무리 좌우로 눈동자를 굴려봐도 느티나무는커녕 느티나무 사촌도 보이질 않았다. 난 속으로 설마 멀리 보이는 수양버들 고목을 두고 느티나무라 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광교 호수공원에서
 광교 호수공원에서
ⓒ 박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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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남편은 활동보조 언니에게 나를 인계한 후 허겁지겁 식사를 하더니 "당신 오늘 수고했어" 하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가로채더니 "나 사무실 가서 일 좀 하다 올게, 다음 주엔 산 너머에 있는 신대 저수지에 가보자" 하고는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남편이 떠나고 오늘 일을 떠올리니 새삼스레 남편이 고마웠다. 산에선 말할 것도 없고 커다란 호숫가 수많은 사람 중에 특수 휠체어는 물론이고 일반 휠체어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남편이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용기낼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더욱 고맙고 뭉클하다. 이런 배우자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 데살로니카 1서 5장 16절

이 말씀을  되새겨본다. 2019. 7.15

태그:#루게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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