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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우리는 4남매다. 언니와 나는 네 살 차이다. 언니 아래로 오빠, 나 그리고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늦둥이 남동생이 있다. 
 
언니와 나는 오랫동안 같은 방을 썼다. 손재주가 좋았던 아버지는 언니와 나를 위해 직접 나무를 사다가 침대를 만들어 주셨고,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린 그 침대에서 함께 자랐다.
  
중학생 문하연, 언니의 '등' 뒤에서 편지를 쓰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일기를 쓰고 소설을 쓰고 편지를 썼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일기를 쓰고 소설을 쓰고 편지를 썼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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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오빠에게 명문고 앞에서 하숙을 시키는 시혜를 베풀면서도, 언니와 내가 공부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험 기간에 밤늦게까지 방에 불을 켜고 있으면, 엄마는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여지없이 불을 껐다.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기에 바로 책을 덮었다. 사실 책만 펴놓고 그 밑으로 일기장을 깔고 낙서를 하고 있었기에 그걸 들키는 게 더 무서웠다. 엄마는 내가 하는 일은 거의 다 쓸데없다고 했고, 대체로 엄마의 눈은 정확했다.
 
어둠 속에서 삼십 분 정도 속닥거리다가 언니는 책상 스탠드를 켜고 공부를 시작했다. 언니는 엄마의 말을 거역한 '불효녀'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일기를 쓰고 소설을 쓰고 편지를 썼다.

중·고등학교 때는 주로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썼는데, 나는 목마와 숙녀나 성산포 같은 시의 한 구절을 주어다가 인생이 외로운 양 까불었다. 알지도 못하는 아이가 내 편지를 읽고 감상에 빠지고 사랑을 느끼는 것이 재밌었다.
 
그렇게 공부한 언니는 늘 전교에서 3등 안에 들었고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다행히 나는 숨만 쉬어도 사랑받는 셋째 딸이라 반에서 30등 안에만 들어도 칭찬을 들었다. 그런 언니가 대학 입학시험을 앞두고 쓰러졌다. 뇌에 종양이 있다고 했다. 엄마는 언니를 광주에 있는 대학 병원에 입원시켰고 언니는 몇 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나는 여수 집에서 언니가 죽을까 봐 날마다 울었다.
 
4남매가 북적거리던 집은 그날 이후 조용해졌다. 아빠는 건설 현장으로, 오빠는 명문고가 있는 다른 도시로, 언니와 엄마는 병원으로, 어린 동생은 이모네로 뿔뿔이 흩어졌다. 큰 집에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난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외동딸인 친구를 부러워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마치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처럼. 언니만 살아 돌아온다면 만지지도 못 하게 한 가죽끈이 달린 일기장도 내줄 생각이었다. 
 
언니는 2년 가까이 병원 생활을 했고, 그사이 우리는 광주로 이사했다. 언니가 회복하는 동안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무기력하게 집에만 있는 언니를 위해 나는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에 와서 언니와 시간을 보냈다. 대학 생활의 꽃이라는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았고 엠티도 가지 않았다. 집에 남은 언니가 외로울까봐 나는 일과가 끝나면 귀가했다. 

당시 엄마는 언니가 악착같이 공부해서 병이 걸렸다고 단정 지었다. 그래서 다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언니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학생 문하연, 언니의 등 뒤에서 미친듯 라디오 사연을 보내다
    
 언니는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미친 듯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경품을 탔다. 내가 자면 언니도 졸릴 거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깨어 있었다.
 언니는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미친 듯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경품을 탔다. 내가 자면 언니도 졸릴 거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깨어 있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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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나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을 우리 집 마당에서 보게 되었다. 언니는 마당에 무릎을 꿇고 엄마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고, 언니 옆에는 영문을 모르는 강아지 해피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자동으로 언니 옆에 무릎을 꿇었고, 이유도 모른 채 같이 눈물을 흘렸다.

언니의 간절함이 통한 건지 엄마는 언니에게 딱 '한 번의 기회'를 줬다. 언니에겐 앞으로 6개월 동안 대학 입시 공부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번 해보고 안 되면 적당한데 선봐서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했다.
   
언니는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나는 언니의 등 뒤에서 미친 듯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경품을 탔다. 내가 자면 언니도 졸릴 거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깨어 있었다. 당시 배우 박상원씨가 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작가는 내 글이 재밌다며 경품은 물론 생방송 통화도 몇 번 시켜줬다.
 
지독한 시간이 흐르고 그것보다 더 독한 언니는 6개월이 지난 후 국립대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내 나이 스물, 언니 나이 스물넷이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밤, 언니와 나는 밤새 이불 속에서 아카데미 4관왕을 한 봉준호 감독보다 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5세에 대학생이 된 언니는 입학하자마자 '엠티'를 갔다. 불효녀가 의리도 없다. 이래서 어리숙한 사람은 늘 손해다. 그래도 난 언니의 청춘이 이제야 빛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나는 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버라이어티 쇼 방청객보다 더 격한 리액션으로 답했다.
 
다음 해 언니는 남자친구를 집에 데리고 왔다. 이 배신감은 뭐지? 나는 언니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더 친밀해진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됐다. 혼란스러운 이 감정을 아무렇지 않은 척 대신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언니가 결혼해버렸다. 나는 결혼식장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결국 엄마한테 쫓겨났다. 좋은 날 재수 없게 운다고. 언니의 결혼식 사진에는 내가 없다. 가족 단체 사진에도 나는 없다.
      
시간은 흘러 지독하게 공부했던 언니는 선생님을 거쳐 장학사가 되었고, 언니 등 뒤에서 쓸데없는 짓이나 하던 나는 간호사를 거쳐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돌아보면 모든 게 운명이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내가 글을 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40대 후반 문하연, 계속 글을 쓰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를 보면 안다'는 말이 맞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이런다고 될까'라고 나 자신을 의심할 시간에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건 나에게 하는 소리다.
   
지난주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모 방송국 드라마 피디를 만났다. 석 달 전, 그는 내가 쓴 드라마의 단점만 요목조목 짚어서 말했다. 하마터면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쓰지 그래요'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후로 나는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분의 뼈아픈 충고 때문이 아니라 이것밖에 안 되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그는 현실적인 조언과 함께 뜬금없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와 내가 나눈 대화가 지금 상영 중인 영화 <작은 아씨들>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프리드리히 교수는 조 마치가 신문에 연재한 글을 보며 '자신만의 고유성이 없다'고 비평한다. 조 마치는 자신이 팔기 위한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지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문득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의 나에겐 뭔가를 쓰는 일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일과 같았다. 그게 금방 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 그랬다. 계속 그랬더니 그 길이 열렸다. 마흔 후반에서야 말이다.
 스무 살의 나에겐 뭔가를 쓰는 일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일과 같았다. 그게 금방 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 그랬다. 계속 그랬더니 그 길이 열렸다. 마흔 후반에서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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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나에겐 뭔가를 쓰는 일이 숨을 쉬고 밥을 먹는 일과 같았다. 그게 금방 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 그랬다. 계속 그랬더니 그 길이 열렸다. 마흔 후반에서야 말이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글로 돈을 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몇 년은 공기 위를 걷듯이 글을 썼다.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덜컹거리고 있다. 이 덜컹거림이 한 단계 성숙으로 가는 길인지 퇴보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그러든지 말든지 계속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안 써지면 안 써지는 대로, 잘 써지면 잘 써지는 대로 말이다. 그러는 동안 내가 또 무엇이 되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오늘 언니가 서울에 올라왔다.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는 딸 짐을 챙기러 온 것이다. 언니 딸이랑 내 아들은 동갑인데, 언니 딸은 대학을 졸업했고 내 아들은 올해 오수를 했다. 넷이 밥을 먹는데 언니는 내 아들에게 '25살에 대학 입학했어도 이렇게 잘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글 쓰고 싶은 조카는 글을 잘 쓰려면 어떡하면 좋은지 내게 묻는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고 진심으로 답했다.
  
다만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안개 속을 걷듯 막막한 이십 대의 내 아들과 조카에게 언니와 내 지난날이 한 가닥 위로가 되기를.
 
'아끼다 뭐 된다'라는 말도 맞다. 가죽끈이 달린 일기장 말이다. 아끼느라 못 썼는데 이사하면서 잃어버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교훈, 있을 때 맘껏 즐기라. 그게 뭐든.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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