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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경제부총리가 금융 부분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정책 수단이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된 바 있다. 당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절름발이라는 표현은 사실 명백하게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이라면서 이 의원의 발언을 지적했다.

이후 논쟁이 이어졌다. '절름발이'는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정책이라는 무생물에 빗댄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가 나오는가 하면, 장애를 비유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는 의견 역시 있었다. 결국 지난 6일 이광재 의원이 직접 페이스북을 통해 "앞으로 의정활동의 언행을 좀 더 세심하게 살피는 계기로 삼겠다"며 사과하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됐다. 

비단 이번 사건뿐만 아니다. 어떤 상태를 비유하기 위해 특정 장애나 질병을 가져다 쓰는 경우는 꽤 많다. 해당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하면서 말이다. 

질병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난치의 상상력> 책 표지.
 <난치의 상상력> 책 표지.
ⓒ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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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누군가에겐 장애와 질병이 비유를 하기 위한 '소재'이지만, 분명 그것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책 <난치의 상상력>을 쓴 저자 안희제는 6년 전에 크론병을 진단받은 후에 이 질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청춘'이라고 하면 으레 '이럴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정상성 규범'에서 조금 빗겨 있다.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몸이 자주 아프고, 열심히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란 어렵다. 자극적인 맛의 '밥버거'를 먹는 것조차 위험을 무릅쓰는 '일탈'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다가올 순간들은 통증과 강제되는 휴식으로 상상된다". 그렇지만 항상 아픈 것은 아니다. 그는 '아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통증은 왔다가, 돌아갔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어느새 또 돌아오는 길고양이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통증이 돌아오면 나를 설명할 언어는 대체로 통증뿐이다. 전혜은은 '아픈 사람'을 "충분히 오래 아픈 바람에 '아프지 않은 나'를 기본 값으로 설정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진단명의 유무는 핵심이 아니었다. '아픔'은 진단명이 담아내지 못하는 나의 경험을 포괄하는 단어였고, '아프지 않은 나'보다 '아픈 나'가 더 일상적인 사람,그래서 '아픔과 동떨어져서는 삶을 설명할 수도 설계할 수도 없는 사람'이 바로 '아픈 사람'이었다. 

아픔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내 삶을 기획하는 데에 있어 아픔이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경영해야 하는 자본주의 현대 사회에서 '아픈 사람'은 자기 관리에 실패했거나 게으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저자의 만성질환은 현행 장애인복지법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크론병 증상이 심해져 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장루 시술을 받게 되면, 그제야 장애인복지법 2조에 따라 장애인으로 '등록'된다. 그리고 장애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 장애인인지 판별하는 작업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의료적 기준으로만 아픔과 장애의 정도를 판단하는 현행법과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의료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아픔은 이해받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지만, 시민단체들이 장애등급제의 '단계적' 폐지는 '가짜 폐지'나 다름 없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더 다양하고 개별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나는 건강한 몸을 위주로 만들어진 사회의 문화로 인해 장애를 경험하는사람으로서, 의료적 기준으로 낙인을 찍는 지금의 장애등급제 '가짜 폐지'를 규탄한다.

(중략) 어떤 몸이든 적절히 의존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원한다. 아파도, 장애가 있어도, 손상보다 지원을 먼저 떠올리는 세상을 원한다. 지원이 볼모가 되어 협상 도구로 전락하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언어를 고민하다
 
 우리에겐 더 많은 ‘경계인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더 많은 ‘경계인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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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아픈 몸에 대해 성찰함과 동시에, 조금은 올바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에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부터 민감해져야 한다. 저자는 일상에서의 실천 중에 자신의 '텍무새' 경험을 공유한다. 텍무새란 텍스트 앵무새의 준말로, 포스터나 카드뉴스 등에 내용을 설명하는 텍스트를 추가할 것을 요구한 저자의 경험이 담긴 말이다. 

포스터와 카드뉴스 같은 콘텐츠의 경우 시각적인 정보만을 전달하기 때문에, 텍스트로 설명을 마련해 두어야 어떠한 신체적 조건에 놓인 사람이든 그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즉,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콘텐츠를 제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텍스트보다 사진의 내용이 더 많은 게시물을 찾아가서 음성 지원을 요구하는 댓글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번 무시당했다. 가끔은 '절차에 큰 변화가 생기므로 논의가 필요하다'는 황당한 대답을 듣기도 했다. 더 오기가 생겨 텍스트가 없는 게시물에는 줄곧 '텍무새'가 등장하게 됐다. 지속해서 지적하다 보니 어떤 곳에서는 계속 무시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지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텍스트를 추가하기도 했다. 

저자 안희제의 책은 이처럼 질병과 아픔, 장애에 대한 시선을 확장시켜 준다. 정상성 규범에 기반한 렌즈로는 우리가 멋대로 상상한 딱 거기까지만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질병과 장애에 대한 상상이 빈곤하다. 우리는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그러한 단정은 하나의 삶이 가진 맥락을 모두 지우고 만다. "(질병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갔다"는 저자의 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더 많은 '경계인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을 이야기하자고 하지만, 그것이 정상성 규범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재난 대비 교육은 모든 몸을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이 건강한 비장애인들만을 대상으로 구할 수 있는 교육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코로나19 참사에서 정신장애인들의 집단감염 및 사망, 기저 질환자들의 사망, 그리고 수많은 자영업자와 노동자들의 생계 위기를 경험한 후에야 우리는 '감염병 시대의 뉴 노말'을 상상하자고 한다. 지진과 화재로 장애인들이 죽었지만, 과연 우리가 재난 이후의 '뉴 노말'을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난치의 상상력 - 질병과 장애, 그 경계를 살아가는 청년의 한국 사회 관찰기

안희제 (지은이), 동녘(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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