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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에서 태안반도 방향으로 승용차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면 태안시내에 도달한다. 그 시내 저 편에 보이는 산이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이다. 충남역사교사모임 여정에 따라 이 백화산에 올랐다. 태안향교를 지나 태안초등학교를 넘어서니 동네가 끝나고 백화산 등산로가 보였다. 그 길을 따라 5분정도 오르니 밋밋한 기념비가 보였다. 동학혁명 기념탑이었다.

▲ 동학혁명 추모탑. 비문 끝에는 ‘1978년 10월 2일. 서산, 당진, 에산, 홍성, 아산지역 동학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 일동’이라고 새겨 있다.
ⓒ 최장문
아니 여기에 웬 동학기념탑? 동학농민전쟁하면 흔히 고부군수 조병갑, 녹두장군 전봉준, 무혈입성 전주성, 그리고 전주화약과 최초 민정기관 집강소 설치, 장렬한 불꽃 우금티 전투가 떠오른다. 이와 같이 동학농민전쟁의 장소는 대부분 전라도로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서산 중학교 길용준 교사의 설명과 기념탑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동학군이 전주성에서 관군과 조건부의 휴전을 하고 남원으로 들어가, 폐정개혁이 여의치 않을 때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다.

1894년 9월 30일 태안방어사의 집에 군수와 안무사 등이 밀회를 갖고 이미 투옥되어 있던 동학의 우두머리 30여 명에 대한 처형을 계획한다. 이 내용을 이방이 엿듣고 동학교도에게 알린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태안 관아를 둘러싼 동학군 수만 명은 관아를 습격하여 처형 직전의 동학두목 30명을 구하고 안무사와 태안군수를 즉석에서 타살한다.

10월 1일 태안군을 접수한 다음 22일 태안을 출발 24일 해미 승전곡에서 관군·유회군·일본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과 접전을 벌여 승리하고 당진을 거쳐 예산까지 나아가 또 한 번의 대격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28일의 홍주 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태안으로 패퇴한 동학군은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한다.

이 기념탑은 그 동안 가보적 존재로 비밀리에 소장되어 오던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충청서부지역 북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04년 6월 <오마이뉴스>에 실린 지요하 선생의 “태안 백화산 교장(校長)바위는 '絞杖'이 맞다”라는 글에는 백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다가 붙잡힌 동학군들이 현장에서 어떻게 죽었을지 에 대하여 ‘때려죽이고 목 졸라 죽였다’는 교장(絞杖) 바위와 관련하여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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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태안 답사(2)]태안 ‘안흥성’과 ‘굴포운하’ 기행

▲ 태안초등학교 뒤편 백화산 기슭에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그 뒤로 보이는 큰 바위가 '교장바위'다.
ⓒ 지요하
문득 태안이 고향인 대학 후배에게서 스쳐가듯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태안 시내 뒤편에 산이 있는데 하얀 바위가 많기에 백화산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바위가 검게 변하여 흑화산이 되는 날에는 국가에 큰 변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아마도 동학전쟁 때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탑 본문 서두에는 태안기포시의 지도자 중에 지곡면 장현리 최형순(崔亨淳)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장현리는 바로 우리 고향 옆 동네다. 그 동네에 최씨 집성촌이 발달했는데 초등 학교때 친구의 아버지는 천도교라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종교를 믿고 있었다.

친구의 할아버지 세대들이 이곳에서 항전하고 이후 정부군과 일본군의 탄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을지 눈에 선했다. 이제 동학 농민전쟁은 교과서 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함께 생활했던 내 친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라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했다.

▲ 추모탑에서 교장바위로 올라가고 있다.
ⓒ 최장문
추모탑에서 등산로를 따라 5분 정도 오르니 지요하 선생이 말하던 교장바위에 도달했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바위들이었다. 그러나 홍성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하여 결국 여기에서 일본군에게 전멸당한 북접 동학군의 살육 현장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 목졸라죽이고(絞), 때려죽였다(杖)는 뜻의 교장바위
ⓒ 최장문
다시 5분 정도 올라가니 누각이 나왔다. 작년에 국보로 승격된 태안마애삼존불에 대한 보호각이었다. 태안 마애불은 2가지 의문점을 던져준다.

▲ 태안마애삼존불
ⓒ 최장문
첫 번째는 언밸런스다. 세 불상 중 가운데 불상이 제일 작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불교 교리가 미흡해서? 석공의 실수? 불교 초기의 마애삼존불이 정형화되지 않아서? 이런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갈 때 안내를 맡았던 길용준 선생님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백화산에 살고 있다는 관음보살이 화엄경에 묘사되어 있는데 태안마애불이 있는 산 이름이 백화산이다. 그러나 관음보살이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보살이 양 옆의 여래보다 클 수 없는 까닭에 작게 표현되었다. 불교 교리를 가지고 설명하자, 나머지 선생님들은 모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 올라가면서 올려볼 때는 몰랐는데 더 높은 곳에서 내려보니 마애불 뒤편으로 군부대로 이어지는 길이 생겨 마애불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최장문
두 번째는 위치 문제다. 왜 공주, 부여가 아닌 변방에 해당하는 서산, 태안 지역에 마애불을 만들었을까?

통설로는 중국 선진문물 수입의 길목에 위치했다는 것과 서해를 무사히 항해하기를 바라는 기원의 의미로 조성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군산에서 금강을 타고 부여, 공주로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중국 산동성에서 뗏목을 타면 평택에서 태안반도 사이에 도착한다고 한다. 풍력이 전부였던 당시의 항해술로는 군산보다는 태안, 서산 앞바다가 훨씬 좋은 위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산, 태안, 당진-삽교-예산-공주-부여로 통하는 길이 발달하게 되고 이 길목에 태안 마애불, 서산 마애불, 예산삽교 사면석불과 같은 문화의 발자국들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의미 있는 주장이(최완수, 간송미술관 실장) 나왔다.

백제가 강화만 일대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공주로 남천 하였을 때 이 곳 내포를 해상 거점의 교두보로 삼아 고구려의 남진을 끝까지 막아내었다. 이후부터는 이 곳 내포가 백제를 지탱해주는 해양 세력의 근거지로 부상하게 되고, 이 때 외래 문물을 활발히 수용함으로써 사실상 백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산태안에 도착한 선진문물을 육로인 예산-공주-부여로 운반하기보다는 연안항로를 통해 금강을 타고 부여, 공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삼국시대 서산태안이 백제해군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근거자료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자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졌다.

▲ 백화산 정상에서
ⓒ 최장문
마애불에서 정상까지는 5분 거리였다. 태안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상에는 충렬왕 때 왜구의 침입과 관련하여 쌓았다는 백화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시작된 태화산 등반과 그 안에서 새롭게 알게 된 역사의 발자국들(동학혁명 추모탑-교장바위-태안마애삼존불-태화산성). 내가 태어나서 자란 서산의 생활권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고, 역사교사로서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백화산은 어느덧 내 마음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태안을 오가며 승용차 안에서만 바라보던 바위산은 아니었다. 대전에 돌아가면 내 주변 사람들, 내 주변 자연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생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왔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 26일-27일 충남역사교사모임에서 주관한 서산·태안 지역 학술 답사에 다녀왔습니다. 태안과 백화산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오마이뉴스>에서 지요하 선생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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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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