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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오후 2시.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서산 개심사에 도착했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665년) 때 창건한 절로 전해지지만 대부분의 건축물은 근·현대 이후의 것들이다. 그러나 올해 초에 ‘목조 아미타삼존불상’이 1280년에 보수했다는 묵서(墨書·먹으로 쓴 글씨)가 발견되면서 개심사는 최고(最古)의 목불을 가진 절로 더욱 유명해졌다.

▲ 목불은 조각을 하고 난 후에 뒤틀림방지, 내구성 강화 등의 목적으로 바닥 안쪽 부분을 깎아낸다. 그 안에 보통 불경이나 불상관련 기록물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올 1월에 불상의 제작 기법을 알기 위해 X선 촬영을 하려고 불상을 옮기는 과정에 뚜껑이 빠지고 묵서가 발견되면서 최고(最古)의 불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최장문
소나무 사이의 투박한 돌계단을 올라가면 사각형의 큰 연못이 나온다. 그 연못 중앙에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개심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치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처럼 속세에서 불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 속세로부터 불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외나무다리.
ⓒ 최장문
개심사에 들어서면 문화재청장 유홍준씨가 말한 것처럼 건축물의 기둥 여기저기에서 자연의 미를 만끽할 수 있다. 과학적이고 직선적인 네모반듯함만을 내세워 약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서양 근대문물의 건축물과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기둥들은 오래된 친구처럼 볼수록 정겹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 껍데기만 벗겨 기둥으로 사용한 소나무들. 굽은 것은 굽은 대로 적당한 위치에 사용한 목수의 안목이 부럽다. 우리의 교육도 네모반듯한 기둥만을 강조하기보다는 개개인의 굽은 정도를 배려하고 발전시켜주는 교육이었으면 좋겠다.
ⓒ 최장문
▲ 창고 문에 달린 잠금장치 꼭지에서도 소박함이 엿보인다.
ⓒ 최장문
▲ 일명 고슴도치 건물. 갑자기 만난 이 황당한 모양의 건물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쪽의 벽은 평평했다.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 최장문
이 건물 위쪽에는 명부전이 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명부전으로 가고, 그 곳에는 10명의 재판관(대왕)이 있고 그 중 한 명이 염라대왕이다. 10대왕은 7일에 한 번씩 일곱 번 재판을 한다. 그래서 49일 후에는 최종심판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에 따라 윤회와 환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명부전이 중시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라고 한다. 고려 때까지는 독립된 전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신앙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 왜 조선왕조에 이르러 중시되었을까?

통론으로는 유교와의 접맥설이 있다. 억압당하는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 유교 윤리와 접맥 될 수 있는 것을 찾아야만 했고. 이런 노력 속에서 불교의 명부전과 윤회사상이 유교의 조상숭배·부모효도와 결합되었다는 설이다.

길준용 교사는 또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돈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가 탄압을 받으며 국가지원이 중단되자 민간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절에서는 부모의 영전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주며 극락왕생을 기도하였고, 대신 이에 대한 경비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 명부전 앞뜰에 줄지어 서있는 돌탑들.
ⓒ 최장문
▲ 명부전 문을 열면 양 쪽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는 역사가 있다. 눈을 마주치거나 말대꾸 한번 하면 그 순간 끝장날 것 같다.
ⓒ 최장문
종루를 보면 굵으면서도 약간 굽어진 네 기둥이 자연스럽고 역동적이어서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서 꼼꼼히 보면 시대의 아픈 흔적들이 남아 있다.

▲ 개심사 종루
ⓒ 최장문
▲ 상처난 기둥과, 종에 새겨진 김종필씨 일가의 이름
ⓒ 최장문
소나무 생전에(?) 기둥의 중간 부분을 일부러 톱으로 상처를 낸 것이다. 누가, 왜 그랬을까? 길준용 교사는 일본의 만행이라 말했다. 1930년대 일본은 중국에 이어 미국과도 전쟁을 한다. 이 때 부족한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의 쌀은 물론 학교의 교문까지도 무기를 만들기 위해 떼어간다. 이 때 송진채취를 위해 소나무에까지도 손을 댄 것이다. 개심사 오른편 산등성이로 가면 이런 아픔을 간직한 채 노송이 되어 서 있는 소나무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종에는 이 절을 보수할 때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 첫 번째에 김종필씨와 일가족의 이름이 있다. 충청도의 중요 유적지에 가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서산 개심사는 그 누가 보아도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절이다. 절 주변의 산과 소나무와 돌계단과 기둥들. 어느 것 하나 더 좋은 혼자만의 자리를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알맞은 곳에 위치하여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작은 절이지만 넓게 느껴지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특히 필자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보통 소망에 귀기울여 줄 듯한 절이기에 더욱 정겹다.

그러나 개심사를 나오며 근심이 남는다. 최근 증축하기 시작한 '상왕산 개심사'라는 절 입구의 문을 보면 돈과 현대문명의 자국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부디 옛 것을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옛 것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증축중인 상왕산 개심사
ⓒ 최장문
'개심사(開心寺) - 마음을 여는 절! 이곳에 가면 흩어진 마음을 열고 다스릴 수 있으리라' 이런 여운을 뒤로 하며 대전행 승용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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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태안 답사(1)]태안 백화산에 올라보셨나요?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해미 톨게이트 - 해미읍내 - 운산방향 5km 정도 -  신창주유소 우회전- 시멘트길 3.7km - 삼화목장 - 개심사 주차장

운산 톨게이트 - 647국도따라 해미방향 7.2km - 신창주유소 못미쳐 좌회전 - 시멘트길 3.7km - 삼화목장 - 개심사 주차장

이번 답사를 주관한 충남역사교사모임과 안내를 맡으셨던 서산중학교 길준용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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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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