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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들은 모두 일어낫! 왜 졸병들을 괴롭히는 거야!"
"쏠 테면 쏴라!"
"탕! 탕! 탕!"


1980년 10월 2일 새벽 0시경 육군 제 37사단 110연대 7058부대(충북 증평)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사관들로부터 구타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 사병 3명이 총기를 발사해 하사 6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하는 '무서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비극으로 이어진 80년 '국군의 날' 밤... 하사 6명 사망, 1명 부상

사건 전날인 10월 1일 37사단에는 국군의 날을 맞이해 아침부터 술이 넘쳐났다고 한다. <오마이뉴스>에 이번 사건을 제보한 최모(48세. 37사단 1673부대 근무)씨에 따르면 내무반마다 막걸리가 한 '식깡'(물 담는 드럼통) 가득 나와 내무반원들이 모두 세수를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사와 사병 모두 낮부터 얼큰하게 술기운이 오른 상태에서 티격태격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총기 사고로 이어진 건 단지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구타 등에 대한 하급자의 불만이 누적돼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날 밤 10시경 7058부대 행정실에 엄모 상병, 선모 일병, 이모 일병 등 3명이 모였다. 엄 상병은 '사소한 일로 졸병들을 구타하는 하사들에게 겁을 한 번 주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도 이에 동의했다.

밤 11시 50분경 엄 상병이 보급계원이던 이 일병에게 '실탄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하자 이 일병은 자신이 보관하던 실탄함의 시건(잠김)장치를 풀고 M16 소총용 실탄 40발을 꺼냈다. 여기에 엄 상병이 이전에 절취·보관하던 15발을 더해 모두 실탄 55발을 보유하게 된 이들은 하사들에게 겁을 주되 여의치 않을 경우엔 하사들을 죽이기로 결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2일 새벽 0시경, 이들은 하사들이 자고 있는 내무반으로 갔다. 엄 상병은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자고 있던 하사들을 깨운 뒤 '왜 졸병들을 괴롭히느냐'고 질타했다. 이에 이모 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쏠 테면 쏘라'며 엄 상병에게 다가갔다. '움직이면 쏜다'는 엄 상병의 위협에도 이모 하사는 멈추지 않았다.

"탕!"

결국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엄 상병이 쏜 총알은 이 하사의 복부를 관통했고, 이 하사는 2일 새벽 3시 30분경 인근 병원으로 후송 중 사망했다. 한 번 불을 뿜은 총구는 멈추지 않고 다른 하사들에게로 향했다. 내무반에 있던 하사 4명이 총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했다. 그리고 출입문 쪽으로 뛰어나가던 유모 하사도 총을 맞았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전치 3개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3명의 병사는 내무반에서 뛰쳐나와 37사단 외곽에 있는 제2초소 쪽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모 하사와 이등병 한 사람이 조를 이뤄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2일 새벽 0시 10분경 제2초소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누구냐'라며 수하(誰何)하던 이 하사는 선 일병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2일 새벽 1시 30분경 후송 중 사망). 그러나 이들은 이등병에게는 손대지 않았다.

25년만에 드러나는 진실... 침묵의 장막, 언제쯤 걷히려나

신군부가 군화발로 세상을 짓밟던 그 시절에 군에서 발생한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 또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군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됐다.

그러나 1980년 당시 사고 현장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근무했던 최씨가 <오마이뉴스>에 사건 내용을 제보하면서 25년 동안의 기나긴 침묵은 깨졌다.

최씨는 "80년 사고 당시는 전두환이 12.12와 5.18을 거쳐 대통령이 되던 시기이자 언론통제가 무시무시하던 때였다"며 "이 사건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도 알아서 스스로 입단속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최씨는 얼마 전 총기 사고가 발생했던 육군 28사단에서 20년 전에도 똑같은 사고가 있었다는 보도를 접하며 자신이 근무했던 육군 37사단 사건도 더 이상 묻어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최씨가 전한 내용을 바탕으로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실을 통해 육군본부 쪽의 자료를 입수해 제보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지점이 많다.

현재 확인된 사실은 ▲이날 밤 사병들의 총에 맞은 하사 중 6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는 것과 ▲3명의 병사 중 이 일병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이후 징역 15년으로 감형됐다는 것뿐이다.

제보자 최씨는 "사병 3명 중 2명은 하사들을 죽인 뒤 자살하고 1명은 체포됐다고 들었다"고 전했으나 엄 상병과 선 일병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연대장, 사단장 등 해당 부대 지휘관들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최씨는 "110연대장이 이 사건 후 전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이날 희생된 장병 및 그 유가족들이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도 현재로선 불분명하다.

25년간의 강요된 침묵. 이제는 이 사건 뿐 아니라 병영 안에 갇혀버린 다른 사건들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망자(亡者)와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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