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가 탔다.
내가 타고 있던 차에 불을 지른, 그였다.
같이 살던 집에 녹음기를 설치했던, 그였다.
차 블랙박스를 복원해 내 행적을 쫓던, 그였다.
한 달 전 마침내 정말로 헤어진 전 남자친구, 그였다.
오전 8시 44분부터 9시 26분까지. 그는 16층에서 내가 나오길 숨죽이고 기다렸다. 40분 동안 아파트 계단에 앉아 18층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겠지. 우리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겠지. 18층에서 내가 타는 걸 확인하고 허겁지겁 16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겠지.
피고인은 2018. 5. 11. 08:44경 피해자가 거주하는 C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D 승용차를 주차한 후, 위 아파트 16층에서 피해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나를 기다린 그의 손에 20cm 칼이 들려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응징하겠다며 집요하게 문자 보내던 그가 내 눈앞에 있었다. 16층에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시간이 억겁으로 느껴졌다. 누구라도 타길 간절히 빌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칼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피고인은 같은 날 09:26경 18층에 거주하는 피해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16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피해자가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호주머니에 있던 미리 준비해간 과도를 들고 피해자를 찌를 듯이 위협하여 지하 1층에 주차된 위 승용차 조수석에 피해자를 강제로 태웠다.
그의 차에 나를 밀어넣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거 같았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순간 외쳤다.
"살려주세요."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기어이 나의 목을 베었다. 봄날이 한창이던, 5월 11일이었다.
피고인은 2018. 05. 11. 09:30경 위 승용차를 운전하여 위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던 중 피해자가 "살려주세요"라고 소리치면서 위 승용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탈출하려고 하자. 미리 소지하고 있던 파도로 피해자의 양쪽 목 부위를 2회 베어 피해자로 하여금 같은 날 10:22경 경부 절창에 의한 저혈량성 외상성 쇼크로 사망하게 하여 피해자를 살인하였다.
넌 죽음. 집에 안 오면 끝인 줄 아는데 착각하지마
니 짐 가지고 가기 전엔 너 아직 내 여자야 짐 가지고 가
널 용서하고 깨끗하게 끝내려 했는데 넌 날 더 이상 용서하지 않게 행동했어. 네가 살아있는 동안은 용서 못한다. 내 모든 것을 걸고 응징한다. 넌 최고로 고통과 후회할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
넌 마지막 여자야 내 사랑을 모독했어. 용서가 없다. 기다려.
2018년 4월 13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와 살던 집에서 나왔다. 그의 연락을 피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단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용서하지 않겠다던 그는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었다. 1년 반 가량 만난 그는 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피고인은 이 사건 범행 전부터 동거하던 집에 녹음기를 설치하거나 차량 블랙박스를 복원하여 피해자의 행적을 감시하였고, 더는 피고인과 관계를 계속 할 수 없다고 판단한 피해자가 2018. 4. 13. 집을 나가 연락을 피하자 피해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자메세지를 지속적, 반복적으로 보내며 피해자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분노를 표출하였다.
그는 내가 사는 집을 알고 있다.
그는 내 차를 알고 있다.
그는 내 직장을 알고 있다.
그는 내가 몇시에 출근해 몇시에 퇴근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내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를 알고 있다.
그는 내 친구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
그는 내 가족을 알고 있다.
내가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용서했다. 2017년 12월, 그가 나와 친구가 탄 차에 신나가 든 소주병 4개를 던졌을 때. 차 본네트에 불이 붙게 했을 때. 구속됐지만 곧 풀려날 그가 무서웠다. 내가 처벌을 원했다는 걸 안 그가 나중에 나를, 내 친구를, 내 가족을 해칠까 두려웠다. 불과 며칠 전, 나를 지켜달라고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했지만 그는 내 뒤를 밟았다. 차에 불을 질렀다. 나는 더 이상 보호를 기대할 곳이 없다.
이 사건 범행은 피해자들이 탑승한 자동차에 신나가 든 소주병을 던지고 불을 붙여 자동차의 본네트를 소훼한 것으로 자칫 피해자들의 생명, 신체에 중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죄책이 무겁다. 피고인은 1998. 9. 25. 청주지방법원에서 일반 자동차 방화죄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폭력 범죄로 2차례 벌금형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래서 법원에 선처를 호소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가 달라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그는 더 무서워졌다.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더 폭력적이 됐고 더 강압적이 됐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죽이겠다며 나를 옭죄었고, 내 가족들을 위협했다.
피해자는 위 사건의 공판이 열리기 전 미리 변호인을 통해 처벌불원서를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판기일에도 직접 출석하여 피고인과 다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선처를 호소하였다. 피고인은 피해자의 용서와 관용 덕분에 이를 유리한 양형요소로 참작받아 2018. 2. 9.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한 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손에 죽었다.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로는 내 죽음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교제살인 피해자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이런 ‘나’가 너무 많다.
25세의 나,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그와 3달 만났다. 그가 내 휴대폰을 숨긴 걸 알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는 내 앞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그으며 자살하겠다고 했다. 내가 집에 가지못하게 막았다. 헤어지면 죽어버린다며 유서를 내 회사 사장님에게 보냈다. 무서웠다. 또 다시 헤어지자고 했다. 그가 내 직장 숙소 2층 창문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 3층 내 방에 침입했다. 나가라고 소리 지르자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죽었다.
피고인은 2018. 4. 1. 23:10경에 C 건물 3층에 있는 피해자의 회사숙소에 찾아가 열린 문을 통해 피해자의 방으로 들어간 후 무릎을 꿇고 피해자에게 다시 만나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용서를 구했으나 피해자가 ‘할 얘기가 없으니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다’라고 말하면서 소리를 지르자 손으로 피해자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피해자가 입을 막은 피해자의 목을 계속 누르고 졸라 피해자를 그 자리에서 손졸림 질식으로 사망하게 하여 살해하였다.
35세의 나, 스포츠토토에까지 손을 대며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그를 피해 지인 집에 머물렀다. 내가 연락이 되지 않자 내 친구에게 찾아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내 집 창문을 깨고 집 안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경찰에 신고했다. 그 날 그의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의 부탁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그를 만나러 나갔다. 누차 헤어지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죽도록 팼다. 쓰러진 내 머리를 밟았다. 나는 죽었다.
피고인은 위와 같이 경찰서에 다녀온 후 2017. 1. 9. 15:48경 위 주거지 1층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량으로 돌아와 자신의 누나에게 전화하여 피해자를 만들 수 있게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고, 피고인의 누나로부터 전화를 받고 위 주차장으로 내려온 피해자와 차량 뒷좌석에서 이야기를 하였으나, 피해자가 계속하여 헤어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피고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차량에 내려 그곳을 떠나려고 하자, 피해자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50세의 나, 이미 10년 전 헤어진 그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운전하는 버스 차고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들이 모두 내린 버스 안에서 한 시간만 대화하자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휘발유를 나에게 쏟아 부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피부 80%에 화염화상을 입었다. 나는 죽었다.
피고인은 2017. 3. 25. 16:44경 서울에 있는 E회사 F 차고지 내에 이르러 버스 승객들이 모두 하차한 후 피해자에게 ‘한 시간만 진지하게 대화를 하자’고 말하였으나 피해자가 이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자 미리 구입하여 가지고 있던 휘발유를 피해자의 전신에 쏟아 부은 뒤 소지 하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여 수리비 미상의 E 회사 F 버스 앞부분을 소훼하고, 피해자로 하여금 전체 피부 80%에 이르는 화염화상을 입게 하여 2017. 4. 7. 00:01경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 중 폐혈증쇼크로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37세의 나, 물류센터에서 함께 일하는 그와 한 달쯤 만났다.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 헤어지자고 했다. 3달 후부터 그가 찾아왔다. 수시로 집 앞으로 와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내가 퇴근하는 길목에 그가 서 있었다. 공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다른 남자와 사귀냐고 캐묻는 그와 함께 있기 싫어 집에 가려했다. 그가 가방 안에 있던 칼을 꺼내 보였다. 도망치려 하자 칼로 나를 찔렀다. 도망쳤던 그는 다시 돌아와 내 가방을 훔쳤다. 아직 살아있던 나를 발로 걷어찼다. 나는 죽었다.
피고인은 같은 날 04:40경 위 공원 잔디밭에서, 바닥에 넘어진 피해자가 “왜 카는데!”라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며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오른쪽 무릎을 꿇은 채 오른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왼손에 들고 있던 위 식칼로 그녀의 복부를 3회 힘껏 찔러, 피해자가 그 자리에서 다발성 복부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함으로써 위 피해자를 살해하였다.
그녀들은 잘못이 없다.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주거지, 연락처, 직장, 가족 및 친구관계, 생활 습관, 행동반경 등 모든 요소가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어 범행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피고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 및 범죄행위들을 정당화하면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던 끝에 피해자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2018고합OOO, 김정민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그들은 너무나 쉽게 그녀를 찾아냈다. 그리곤 죽였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가장 친밀했던 남자친구에 의해 죽어간 여성은 무려 108명이었다. 열흘에 한 명 꼴로 죽었다.
맞아 죽었고 찔려 죽었고 목 졸려 죽었다.
그 참혹한 죽음에서 데이트라는 단어를 걷어내기로 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교제살인이다.
<오마이뉴스>는 지금부터 우리 사회에 이 교제살인이라는 화두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