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7.09.03 14:04수정 2007.09.04 09:03
그대, 나무를 좋아하는가? 밤톨보다도 작은 씨앗이 어미의 곁을 떠나 무심히 어느 땅에 발을 디디면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10년이고 100년이고 묵묵히,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들을, 그대 혹시 좋아하는가. 바람이 불면 바람을 안고 춤을 추고, 비가 내리면 비에 젖어 손바닥을 흔들며, 분수에 뛰어든 아이처럼 기꺼워하는, 그러다가도 끝내는 태풍에 가지가 찢어지고 홍수에 뿌리째 떠내려 가야 하는 나무를, 그대 정녕 좋아하는가.
동구 밖에 서서 이마에 손을 얹고 떠나버린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무. 울울한 숲속에서 한 뼘의 햇빛이라도 받아보려고 서로가 서로의 팔을 잡아당기며 발돋움을 하고 어깨싸움을 하는 나무. 너무 높아서 너무 커서 너무 오래 살아서 그 그늘 아래는 어느 것도 부지 할 수 없는 폐허가 되어버린 땅 위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쓸쓸함을 안으로 달래야 하는 나무. 그런 나무를 보러 그대는 길을 떠난 적이 있는가. 만약 그대가 그런 연유로 길을 떠나보았다면 그대는 세상살이에 치이고 사람 사이에 부대끼어 한참이나 가슴이 삭막했음에 틀림없다.
나무의 천국, 세코이어 국립공원(Sequoia National Park, 미 캘리포니아주)을 찾아가는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행히 길은 크게 멀지 않았다. 내 여행의 중간 거점인 새크라멘토에서 차로 불과 서너 시간 거리. 6월 중순의 아침 태양은 아직 달구워지지 않았고 록키의 패키지 관광에서 삭막해진 마음은 여태 데워지지 않았는데, 스스로 몰아서 가는 차는 노루만큼이나 빨라서, 산을 넘고 들을 넘고 산을 넘고 들을 넘고 산을 넘으니 세코이어였다.
공원의 초입은 한적한 강원도 산골 같았다. 계곡 아래로는 자그마한 개천이 흐르고 산기슭에는 키 낮은 관목수들이 옹송거리고 떼를 지어 늘어서 있어 강원도의 여늬 산이나 별다름이 없어 보였다. 다만 선인장을 닮은 이름 모르는 나무 한 그루, 꽃을 피워 화려함을 드러냄이 그나마 색달라 보일 따름이었다.
길을 따라올라가자 산은 상당히 가팔라졌다. 해발 500m에서 시작되는 공원은 북미대륙의 최고봉이라는 4417m 휘트니산을 정점으로 4000m급의 고봉들로 줄을 이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품에 안고, 운무속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산맥은 떠나는 기차처럼 남북으로 내달았고 우리는 그들을 쫓아 동서로 기어들었다.
공원은 나무들 세상이었다. 록키의 산들이 수목한계선을 넘으며 흙 한점 발리지 않은 바위
로만 구성되어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데 반해 이곳 세코이어 공원은 산 전체가 푸근한 흙으로 덮혀 그 위로 빼곡히 나무들이 채워져 있었다. 나무들은 갈수록 커졌다. 초입의 나즈막한 관목들은, 산으로 들어갈수록 보통 키의 침엽수로 바뀌더니, 산구비를 몇 번 돌자 거대한 자이언트 세코이어 숲으로 변해버렸다. 세코이어 나무는 커도 너무 컸다.
나무 박물관 앞에 차를 주차하고 발을 땅에 내려 놓으니 세코이어들은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쌌다. 그들은 바벨탑처럼 한사코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운무는 서슬에 기가 질려서인지 땅 위에 내려 앉았고, 운무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찾는 벌레처럼 나무 주위를 이리저리 맴돌았다. 세코이어들은 길고 굵고 곧았다. 휘어지고 비틀리고 한 아름도 안 되는 우리 산의 나무에 익숙한 내 눈에 그것은 나무라기보다 나무색깔 나는 시멘트로 만든 거대한 조형물처럼 느껴졌다.
잠시 박물관에 들렀다가 이 세상에서 현존하는 생물 중에 덩치가 가장 크다는 '제너럴 셔먼' 나무를 찾아갔다. 수령이 2500년이나 되고 높이가 83.8m, 밑둥둘레가 31.3m, 나무줄기의 부피가 1486㎥, 줄기의 무게가 1385ton 이나 된다는 거대한 자이안트 세코이어는 촉촉히 내리는 안개비를 맞으며 말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계란만한 열매가 이 땅에 무심히 흘러와서 콩알보다 더 작은 씨앗을 틔우고 비와 햇빛과 바람을 마시며 자라온 지 2500년. 많은 산(生) 것들이 그보다 뒤에 나서 그보다 먼저 갔고, 그보다 컸으나 그보다 작아졌고, 그보다 강했으나 그보다 약해졌고, 그를 공격했으나 그를 꺽지 못했던 나무. 산불과 지진과 홍수와 바람을 버텨온 나무. 그 나무는 그냥 말없이 그곳에 서 있기만 했다.
그 앞에 서니 나는 터무니 없이 작았다. 나의 생은 터무니 없이 짧아 보였다. 인간세사(人間世事)에서 이순(耳順)을 넘기면 무언가 깨달을 만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앞에 서니 나의 생각은 터무니 없이 어리석었다는 것만을 깨닫게 되었다. 2500년을 살고도 그는 무얼 아는 체 하지 않았다. 2500년을 살고도 그는 늙은이 행세를 하지 않고, 2500년을 살고도 그는 얼마나 더 살지 헤아려 보지 않고, 2500년을 살고도 그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니,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의 삶은 경외였다. 그의 삶은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늘근백수가 되어 이 땅 저 땅을 여행이랍시고 떠도는 나에게, 한자리에 붙박혀서 2500년을 버티는 그의 삶은 내 어깨를 내리치는 날카로운 죽비였다. '어리석은 자여, 너는 어디로, 무얼 찾는다고 떠돌고 있느냐'하는…. 그런데 정말로 그의 생은 한 번도 지루해 본 적이 없었을까?
나무 사이로 만들어진 트레일 코스로 한 시간 남짓 걸었다. 나무들은 공중에서 하늘을 덮고 있어서 그런지 땅 위에는 널찍하게 서로 비켜나 있었다. 나무가 높이 오를수록 나무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그 아래는 어떤 작은 나무도 범접하지 못했다.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끼리 모여 있고 그들은 도심을 벗어난 산동네의 판자촌처럼 큰 나무로부터 멀찌김치 비켜선 채 그들끼리 다닥다닥 서로 붙어 놀았다.
커다란 나무 사이를 지나는 관광객의 행렬은 멀리서 보면 줄을 이어 행군하는 개미떼와 같았다. 개미들은 유명하다는 나무를 찾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갔다. 산은 아직도 운무에 덮여 있고 나무들은 운무를 뚫고 하늘 위로 솟았는데, 인간들 나무 주위를 뱅글뱅글 돌기만 하였다.
나무 순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이 놈의 땅에는 세계제일이란 것이 왜 이다지도 많은지) 나파 근처의 나무 화석 숲에 들렀다. 300만년 전에 센트헬레나 화산이 폭발했을 때 거대한 지진이 덩달아 일어났고, 지진으로 나무들이 쓰러지고 불에 타고 화산재와 용암에 덮여 장구한 세월에 걸쳐 화석이 되었다고 한다. 화석 숲 지역은 별반 넓지 않았으나 23그루의 나무 화석들이 300만년의 세월을 디디고 곳곳에 누워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또 다른 의미에서 뭉클하게 했다.
왜 이 나라의 것은 모두 큰가. 모두 넓고 길고 게다가 나무들은 오래 살기까지 하는가. 석양을 등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바람이 세차게 일었다. 바람은 달리는 차의 백미러를 스치며 들판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바람이 지나간 곳에서는 나무들이 허리를 굽히며 그를 맞고 또 보내고 있었다. 떠나온 고향의 산마루에 서 있던 낮은, 빼빼 비틀린 못 생긴(?) 소나무들이 생각 났다. 그들도 지금쯤 바람에 흔들리고 있으리라.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2007.09.03 14:04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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