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65회

등록 2007.09.04 08:11수정 2007.09.0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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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변했다. 갑자기 좌등은 능효봉과 설중행의 변화에 당황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방관자였다. 물론 좌등 역시 능효봉에 대해서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설중행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두 사람에 대해서는 사실 그리 크게,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헌데 이 순간 좌등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사람이 순식간에 저렇듯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인간 본성의 그늘에 숨어있던 잔혹함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일대 패주(覇主)로서의 위엄도 엿보였다.


"물렀거라."

분분히 앞으로 나서는 제자들을 보며 자하진인이 나직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당황함이라든가 두려움 같은 것은 사라져 버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는 일대종사로서의 위엄마저도 은은히 풍기고 있었다.

그는 거추장스런 겉 장포를 벗었다. 그러자 화산 전통의 무복이 나타났는데 젊은 사람과 같이 군살 하나 비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지금까지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던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지금껏 나는 화산을 위해 살아왔다. 화산이 살 수 있다면 온갖 비겁함과 모욕도 감수했고, 그 어떠한 비난이나 비웃음도 참아왔다. 앞으로도 그럴 거니와 너희들 역시 그러하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희는 경거망동하지 말라.”

마치 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 말에 제자들의 안색이 처절하게 변했다.


"사부님…"

“모든 허물과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것 역시 화산을 위하는 마음이었을 뿐.... 그 누가 나를 비난하고 욕해도 나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비난과 책임은 내 한 몸으로 족하길 빌 뿐.”


자하진인이 시선을 제자들로부터 설중행에게 돌리며 한 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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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담은 자네가 죽였나?"

중의는 연거푸 석 잔을 마신 후에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이렇듯 술을 연거푸 석 잔이나 마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심정이 복잡함을 의미했다. 허나 아직도 운중과 시선을 마주칠 자신이 없는 듯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잔에 머물러 있었다.

그 질문에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앉아있는 다섯의 제자들이었다. 아무리 사부의 친구라 하지만 대놓고 저렇듯 묻는 것은 친구로서의 예의도 아니고, 더구나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철담어른은…이미 죽은 윤석진이…패륜을…."

옥기룡이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어른들 말에 끼어드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허나 사부를 욕되게 하는 말은 제자로서 참기 힘들다. 그래서 나선 것이지만 사부를 비롯한 중의와 성곤의 시선까지 받고나자 옥기룡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부의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지만 엷은 미소를 띠워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은 중의 쪽으로 향했는데 그의 고개는 천천히 끄떡여지고 있었다.

"그렇다네."

그 말에 중의와 성곤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의 얼굴색이 홱 변했다. 이 무슨 말인가? 끊임없이 추측하고 소문으로 나돌던 말이 사실이었던가? 정말 철담어른을 살해한 사람이 제자인 윤석진이 아니고 바로 철담어른의 친구이자 자신들의 사부란 말인가?

경악에 찬 시선이 사부를 향할 때 성곤이 술잔을 들이키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의 실태를 깨달은 듯 시선을 모두 자신의 앞 탁자로 내리 깔았다.

"운중이 선선히 인정한 이상 내가 설명을 하는 것이 도리이겠군."

성곤은 다시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의 목소리는 다른 때와 달리 착 가라앉아 있었다. 중의의 얼굴에 의혹과 약간은 낭패의 기색이 흘렀다. 성곤 역시 운중과 같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쇄금도…그 자식이 상만천의 사주(使嗾)를 받아 자신의 사부를 시해하려 한다는 것은 철담도 감을 잡고 있었어. 하지만 철담이 아무리 방심하고 있고, 또 가려란 계집이 장난을 쳐 놓았다 해도 윤석진이 철담을 시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동정오우라는 위명에 대한 자부심이었을까? 성곤의 말투는 단정적이었다.

"나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네…재보가 동정오우의 진정한 능력을 완벽히 몰랐던 셈이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네. 상만천은 나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무위를 가지고 있네. 그것을 모를 상만천이 아니지. 그럼에도 그가 그런 계획을 세웠던 것은 그가 믿는 또 다른 것이 있었네. 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지."

성곤은 다시 술잔을 입에 대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사실은 자신도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밤이 새기 전에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도리다. 그 뒤의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겠군…."

아무래도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중간의 이야기를 생략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은 내용이다. 보주를 제외한 좌중은 성곤의 입만 보고 있었다.

"철담은…일년 전부터…아니 어쩌면 수년 전부터 갈등을 겪어왔을지도 모르지. 하여간 그가 마음을 굳힌 것은 일년 전 쯤이라고 말하더군."

"…"

"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점차 표면화되기 시작하고 추태감이나 상만천이 회를 장악해 역모까지 꿈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철담이 알게 되었다네. 거기에 바로 중의 자네가 끼어 있다는 사실까지도…."

중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가 보다. 중의의 시선이 잠시 추교학의 얼굴을 스쳤다. 저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사실까지도 철담과 이 친구들은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고민은 거기서 시작되었고, 그 때까지 회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철담이 방황하게 되었지. 인간적인 고뇌와 자책 그리고 심한 죄책감까지 겹쳐서 그를 괴롭혔지."

말하던 성곤이 궁수유를 힐끗 보았다. 철담의 인간적인 고뇌와 자책감은 궁수유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친구의 제자와의 용서받지 못할 관계는 그가 회에 실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자신을 괴롭혔다.
 
"그는 스스로 살아갈 존재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네. 스스로 자살할 생각까지 수백 번 넘게 했다니까."

이렇듯 모든 것을 얻은 사람일지라도 행복하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이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업으로 인해 모든 조건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더라도 그를 불행으로 이끌 여러 가지 변수가 잠복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주어진 삶에 대해서 불평하고, 자학하고…부모나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옳은 삶의 자세가 아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무협소설 #천지 #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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