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에서 "병역의무와 관련없는 농약살포 작업은 인권 침해"라고 국방부장관을 상대로 권고를 결정하자 누리꾼들이 '과수원병' '과외병' 등 황당한 군대 보직 경험을 쏟아내고 있다.
나와 같은 경험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 한다. 들어나 보았나? '자전거병' 일명 자전차포 근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보병, 전차병, 통신병처럼 자전거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병사처럼 들린다. '자전거포병'이라고 하면 무슨 포병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전거의 수리를 담당하는 '자전거병'이었다.
군대에 무슨 자전거병이 있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 육군과 해군은 몰라도 공군에는 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조종사와 비행기를 유지관리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부대가 존재하고, 이들 부대 사이에 문서 전달을 하는 행정병들에게 자전거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기지 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부대를 마냥 걸어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지 내에서는 인가된 차량만 운행할 수 있어 일반 병이나 부사관들은 자전거를 탄다.
또 기지 내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이 이용하는 네발 자전거, 여성용 자전거 등등. 공군에는 자전거가 많이 있다.
훈련병 시절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훈육중대장이 자전거 고칠 줄 아는 사람, 손을 들라고 했다. 중대장이 사이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던 터라 어디 고장 났는가 싶어 내가 손을 들었다. 그랬더니 훈련병 번호와 이름을 적어갔다.
그리고 근무지 배치가 있던 날 '너는 자전거포 근무다'라며 야전 정비대대 아무개 준위한테 신고하라는 것이다.
야전 정비대대, 자전거포 이게 무슨 일이야, 한동안 정리가 안 됐다. 사실 내가 가장 원한 건 '사찰병'. 민간인 사찰하는 게 아니라 '절', 기지 내에 있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관리하는 일을 1지망 했다.
2지망은 실내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이발병, 이발소 근무였다. 모든 훈련병은 자신이 원하는 근무지를 지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학입시처럼.
그날 저녁 고참병들이 나보고 최고의 보직을 받았다고 했다. 이제부터 군생활 활짝 피었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선임병은 동생의 친구. 게다가 제대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근무하니 이보다 편한 보직이 어디 있는가?
자전거 정비야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수 없이 해보지 않았던가.
"이병 최백순 1993년 3월○일자로 자전거포 근무를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그렇게 고참에게 신고하고, 자전거포병의 생활이 시작됐다.
나의 주적? 아니 주요 고객은 문서 담당병, 부사관들이었다. 한번은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데 중령이 아기 자전거를 가지고 와서 "이것 좀 고쳐 주세요" 하기도 했다.
수리하는 곳이 한 곳이다 보니 거드름도 좀 피운다. 기분 나쁘게 반말을 하거나 평판이 안 좋은 사람이 오면 수리는 무기한 대기다.
부품 조달이 안 된다고 하면 그만이다. 수리가 될 때까지 그 사람은 걸어다니거나 남의 자전거를 빌려 타야 한다.
그래서 가끔 음료수도 생기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군인)들을 만나 친해질 수 있었다. 또 자전거포에서는 오토바이도 고친다. 펑크에서 엔진수리까지 다양한 기술을 배웠다.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가 나오면 나는 자랑스럽게 야전 정비대대 자전거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단기사병', 일명 방위였다고 고백한다.
1993년 내 나이 스물다섯 당시에 공군 방위는 기지 내에서 1개월의 기초훈련을 받은 뒤, 세탁소, 이발소, 장교식당, 장교숙소, 목욕탕, 관사관리반 등등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퇴근 보고를 하러 가면 담당준위가 "최상병 오늘 뭐했어?" 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빵구 다섯 개 때웠습니다"하고 씩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 병역기록에는 보급대에서 근무한 걸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10여년간의 신문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조그마한 자전거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2007.09.05 17:12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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