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성주? 참외의 고장 성주를 둘러보다

[경북 서남부 여행] 성주 여행

등록 2007.09.06 10:33수정 2007.09.0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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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성주? 아 다르고 어 다르다더니 같은 경북에 있는 고장인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지명에 잠시 햇갈린다. 한창 참외의 철이 지나고 있다. 참외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바로 경북 성주, 가히 참외의 본고장이라 할 만하다.

성주는 지역적으로 기상재해가 적고, 낙동강 유역으로 물이 풍부하며, 안개가 적어 일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참외 생산의 최적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 참외생산의 62%가 이곳 성주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상주는 특색있는 여행지가 있는 고장은 아니지만, 여러 종류의 문화유산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거기다 처음 찾는 고장이니만큼 기대감도 남다르다.


한개마을의 전경 영취산 자락에 조성된 한개마을의 풍경
한개마을의 전경영취산 자락에 조성된 한개마을의 풍경문일식

달성에서의 마지막 여정지인 삼가헌을 나와 낙동강을 건넌다. 달성과 성주는 낙동강으로 인해 경계가 나뉜다. 한개마을은 성주시내와 다소 떨어져 있다. 조선 세종때 진주 목사를 지냈던 이우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래 성산 이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한개마을 역시 배산임수의 길지로 마을 뒤편으로는 영취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백천이 흐르고 있다. 오래 전 이곳에는 큰 나루터가 있어 교통의 요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고 한다. 한개라는 지명도 바로 그런 이유로 붙었다. 즉, '한'은 '크다', '개'는 나루라는 뜻으로 큰나루라는 뜻이 된다.

마을입구에는 한개마을 안내표지판이 있다. 500여년의 깊은 역사를 유감없이 발휘하 듯 안내표지판도 큼지막하다. 마을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배산인 영취산과 그 아래로 한개마을이 짙은 녹음에 폭 빠져있다. 영취산을 바라보며 서서히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달성의 인흥마을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람이 들어가 사는 가옥을 들여다보는 것은 여간 신경쓰이고,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아무리 문화재라는 간판을 걸었다 할지라도 시도때도없이 불쑥 찾아드는 낯선 외지인의 호기심 어린 방문은 주인장에게 부담스럽다.

이런 대립은 결국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강한 반발감으로 표출되고, 그곳을 찾는 여행객들은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데 대한 불만으로 불쾌한 기억을 갖게 된다.


어쩌면 그런 순방향적인 매개체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문화관광해설사의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한다. 문화유산에 대한 적극적인 해설과 함께 고택 방문도 어느정도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날은 문화관광해설사분이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은 그냥 마음 편하게 마을길이나 좀 누벼야겠다 싶었다. 아! 어느 것 하나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나의 옹졸한 변명이다.

한개마을의 하회댁 사랑채 앞에 조성된 잔디도 깔끔하고, 돌을 놓아 안채로 들어가게끔 만들었다.
한개마을의 하회댁사랑채 앞에 조성된 잔디도 깔끔하고, 돌을 놓아 안채로 들어가게끔 만들었다.문일식

한개마을은 두 방향으로 8개의 고택이 있다. 마을 입구에 이르면 친절하게 양 방향으로 어떤 고택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왼편으로 가면 월곡댁, 북비고택, 교리댁으로 갈 수 있고, 오른편으로 오르면 첨경재, 한주종택, 도동댁, 극와고택, 하회댁 등을 만날 수 있다.


달성의 인흥마을과의 다른 점이 있다. 달성의 인흥마을이나 산청의 남사마을은 담장을 따라 길게 들어가 꺾이면 한 집이 나오고, 다른 집을 가기 위해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나와야 한다. 미로와 같은 길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갑갑하면서도 닫혀있는 구조지만, 한개마을은 그렇지 않다. 마을길을 터벅터벅 걷다보면 바로 대문이고, 둘러보고 나와서 가던 방향으로 가다 대문이 나오면 둘러 볼 수 있는 쉽고, 틔인 구조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보니 담장 너머로 두런거리는 이야기 소리도 들리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도 들린다. 마당 한귀퉁이를 지키고있는 지킴이 개들의 듬직한 목소리는 덤이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집들이다. 오른쪽 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고택이 바로 한주종택이다. 조선말 유학자인 이진상이 학문을 닦던 곳이다. 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 오른편으로 평범한 사랑채가 있고, 그 옆으로 이어져 안채로 드는 문이 있다.

한주종택에 있는 견공의 집 유난히 튼실해 보이는데다 주인장의 배려가 돋보이는 견공의 집이다.
한주종택에 있는 견공의 집유난히 튼실해 보이는데다 주인장의 배려가 돋보이는 견공의 집이다.문일식

철저한 주리론자였던 한주 이진상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사랑채의 한 편에는 주리론자답게 '주리'의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확연히 커보인다. 사랑채 앞에는 눈에 띄는 큰 개집이 하나 놓여 있다. 지금은 주인장이 없는 듯 하지만, 지금까지 본 개집치고는 가장 튼실하면서도 크다. 행여 습한 기운이 올라올까 벽돌을 네 귀퉁이에 받쳐 바닥을 띄워주고, 비가 들이칠까 지붕도 앞으로 많이 튀어 나와있다. 주인장의 큰 배려가 보이는 대목이다.

문 앞으로는 노란색 강렬한 화원까지 조성되어 있으니 이 곳에서 살던 녀석은 좋은 주인을 만나 호사를 누렸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주종택의 별당채인 한주정사는 아쉽게도 보수공사중이어서 영취산 자락에서 들판을 향해 내려다보는 웅장함을 맛보지 못했다.

'북비'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문 '북비'라는 현판이 작은 문에 걸려 있다.
'북비'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문'북비'라는 현판이 작은 문에 걸려 있다.문일식

고샅길을 내려와 이번엔 월곡댁, 북비고택, 교리댁이 있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정헌공응와이판서구택"이라는 현판이 걸린 높은 솟을대문이 눈길을 끈다. 조선 고종때 판서를 지낸 응와 이원조의 옛집이란 뜻이다. 말을 타고 지나도 될 정도로 유난히 높아보이는 대문이 있는 이곳은 북비고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돈재 이석문이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세상을 떠나자 낙향한 뒤 사도세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이석문의 후손이 장원에 급제하였는데, 정조가 "너희 집에 지금도 북비(북쪽으로 낸 대문)가 있느냐?”라고 물어 사도세자에게 충성한 신하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대문으로 들어서 집안 구석구석을 본다는 것은 나로서는 영 어색하다. 그렇다보니 고택답사라기보다는 마을길 산책이 되기 일쑤다. 사람이 살아가고 있기에 살아있는 집이고 보면 보다 유익한 여행이 될 터인데 한개마을을 돌아나오는 길은 영 아쉽기만 하다.

동방사지 7층석탑 전경 참외의 고장 성주시내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동방사지 7층석탑
동방사지 7층석탑 전경참외의 고장 성주시내 입구에 세워져 있는 동방사지 7층석탑문일식

한개마을을 나와 성주시내로 접어들었다. 30번국도와 33번국도가 교차하는 성주시내에는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서 있는 동방사지 7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한 동방사의 터로 알려져 있고, 참외의 고장을 대변하는 듯 탑 사방으로는 참외를 재배하는 하얀 비닐하우스가 가득 들어차 있다.

성주시내에서 약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성산의 능선에는 가야 6국 가운데 하나인 성산가야의 유적인 성산동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고분군에서는 성주읍내가 아스라이 보인다. 동방사지 7층 석탑은 경북유형문화재 60호, 성산동고분군은 사적 86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유적을 둘러보고 성주를 빠져나가다가 성밖숲 표지판을 발견했다. 성밖숲이라. 성밖에 있는 숲이란 뜻인가? 특이한 숲 지명에 호기심이 이끌렸다. 성밖숲은 말 그대로 성 밖에 있는 숲이다. 성주 읍성 서문 바깥쪽에 조성되었다하여 붙은 지명으로 마치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유래가 전한다.

왕버들나무 수령 300-500년에 이르는 왕버들나무가 조성된 성밖숲은 성주사람들의 평온한 휴식처다
왕버들나무수령 300-500년에 이르는 왕버들나무가 조성된 성밖숲은 성주사람들의 평온한 휴식처다문일식

16세기 무렵 성주읍성 서문 바깥쪽에 사는 어린이들이 이유없이 죽어나가는 재앙이 발생했다. 지관에게 물어보니 마을 주변에 있는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데 숲을 조성하여 서로 보지 못하게 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이천변에 숲을 조성한 것이 이 숲의 시초다. 초기에는 밤나무를 심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내고 왕버들을 조성하게 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 재앙이 사라진 탓일까? 성밖숲은 성주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휴식처가 된 듯 하다. 수령이 300∼500년이나 되는 아름드리 왕버들 아래로 성주사람들은 차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기도 하고, 나무아래 돗자리를 펼쳐놓고 낮잠을 즐기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굵직한 나무기둥에 기대어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포근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성주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이천변을 따라 조성된 왕버들나무는 모두 59그루로 천연기념물 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전경 세종대왕 슬하 18명 왕자의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의 전경세종대왕 슬하 18명 왕자의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문일식

이제 성주를 떠나 김천으로 향하는 길이다. 강렬했던 햇살이 서서히 잦아들고, 한여름의 열기로 뒤틀려있던 대지가 차분히 식어가는 저녁 무렵이다. 어두워질까 두려운 맘에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안 보고는 후회할 것 같아 급한 마음으로 세종대왕 왕자태실을 찾았다.

태실은 왕실에서 아이가 탄생하면 전국의 길지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태를 보관하는 태무덤이다. 이곳에는 유난히 자녀가 많았던 세종대왕 18왕자의 태가 묻혀 있다. 뒷줄에는 소헌왕후 심씨의 적자인 대군 7명이, 앞줄에는 빈궁의 소생인 군 11명의 태실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세종의 왕위를 이은 문종의 태실은 없고, 세손인 단종의 태실이 모셔졌다는 것이다.

 계유정난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 태실의 흔적과 부러진 태비.
계유정난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 태실의 흔적과 부러진 태비. 문일식

세종대왕 왕자태실에서는 세조의 왕위찬탈 역사를 고스란히 짚어볼 수 있다. 문종의 짧은 치세와 죽음, 어린 단종의 즉위는 세조에게 왕위찬탈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결국 세조는 계유정난을 시작으로 왕위찬탈을 하기에 이른다.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아울러 숙적이자 세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마저도 유배를 보내 사사시키게 된다.

이후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지만, 거사 직전 들통나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은 결국 영월로 유배된다. 이후 세조의 형제인 금성대군이 또한번 단종복위운동을 일으키려 하지만 또다시 좌절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또한 어린 단종에게 젖을 먹이고 동정했다는 이유로 혜빈 양씨의 소생인 한남군과 영풍군, 영빈 강씨의 소생인 화의군도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세종대왕 왕자태실 가운데 태실이 훼손되거나 태비가 없는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은 바로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반동의 대가를 받게 된 것이다. 왕위와 권력에 대한 욕심은 피를 나눈 형제끼리 물불을 가리지 않게 하니 그 욕심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외롭게 홀로 떨어져있는 단종의 태실 비운의 왕, 단종의 태실이 외롭게 떨어져 있다
외롭게 홀로 떨어져있는 단종의 태실비운의 왕, 단종의 태실이 외롭게 떨어져 있다문일식

세종의 세손이자 조선 6대 임금이었던 단종의 태실도 이곳에 있다. 왕자가 아닌 세손의 태실이 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숙부로부터 왕위를 빼앗긴 설움을 간직한 듯 세종의 왕자 7기의 태실보다 한칸 뒤로 밀려나 구석에 외로이 자리잡고 있다. 반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세조의 태실 앞에는 거북모양의 귀부와 비신을 가진 태비가 또 하나 세워져 있다.

진양대군(세조)과 안평대군의 태실 진양대군(세조)과 안평대군의 태실은 한 핏줄이지만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
진양대군(세조)과 안평대군의 태실진양대군(세조)과 안평대군의 태실은 한 핏줄이지만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문일식

세조의 태실은 그 옆에 부러진 태비와 파괴된 태실을 가진 안평대군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피를 나눈 한 형제였지만, 하나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는 냉혹한 정치 상황이 만들어낸 피로 얼룩진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런 수난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옹기종기 모여있는 18기의 왕자 태실은 정적을 깨는 산새들의 지저귐속에 평온하기 그지 없다.

제법 날이 어두워졌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내려선 태실입구에서 바라본 선석산의 녹음은 어느새 짙은 어둠의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둠이 향하는 자취를 따라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굽이진 길을 따라 매끄러운 곡선을 그린다.

덧붙이는 글 | 지난 경북 서남부여행 달성1,2편에 이은 성주여행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경북 서남부여행 달성1,2편에 이은 성주여행기입니다.
#한개마을 #세종대왕왕자태실 #성밖숲 #동방사지7층석탑 #성산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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