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의 피어린 싸움터였던 산성은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지난 시대가 남긴 하나의 건축적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옛 싸움터이자 인공 구조물이었던 산성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과 성안 그리고 주위에 꽃과 풀들이 무성하게 피어남으로써 자연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제 산성은 새로운 기능을 가진 장소로 새로이 태어나고 있다. 산 허리를 굽이 도는 성벽, 그 자연스런 곡선이 주는 아름다움은 어떤 미술 작품도 가지지 못한 장쾌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산성은 이제 미적 공간, 문화적 휴식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높은 위치에 있는 산성은 그곳으로 오르는 사람에게 체력 단련을 시켜주는 부수적 기능까지 수행한다.
어느 쪽에서 차를 내리거나 4km 이내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 접근의 용이함과 420m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높이.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은 대전 시민에게 사시사철 사랑받는 문화유적이다.
백제부흥군의 주요거점 중의 하나인 계족산성
지난 9일(일요일), 계족산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가을 햇볕이 꽤 따갑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산들은 정수리 위에 뭉게구름을 잔뜩 이고 있다. 발아래에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얕은 산자락엔 물봉선이 빠알갛게 모듬살이를 하고 있다.
계족산성이 저만치 가까워진다. 이제 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되는구나. 어느새 성미 급한 마음 한 자락이 산성에 도착하기라고 한 듯이 질펀하게 자리를 깔고 앉는다. 일본잎깔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일본잎깔나무는 침엽수이면서 가을이 되면 누렇게 물들고 잎이 떨어지는 낙엽수인 특이한 나무다.
우리에겐 흔히 낙엽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나무다. 5·16 이후 조림사업을 하면서 빨리 자라면서 곧게 자란다는 이유로 전국 각지에 이 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철도 침목이나 전봇대로 쓰이기도 하고 나무젓가락의 주 재료가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빨리 자란 탓에 조직은 물러 고급 목재로 쓸 수 없다는 게 결정적 단점이다. 희한한 것은 역사 유적지 가까운 곳에 가면 어김 없이 일본잎깔나무 조림이 있다는 사실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성장지인 고드미마을 들머리가 그렇고 이 계족산성 가는 길이 그렇다. 왜 하필 일본잎깔나무 숲이어야 할까.
남문지를 통해서 성으로 올라간다. 성에 오르자 사방팔달 확 트인 경관이 시원하다. 동남쪽으로 눈을 돌리자 1.3㎞쯤 떨어져 있는 개머리산성이 보인다. 대청호가 생기기 전 성 옆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었으니 개머리산성은 이 수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 성으로 보이며 계족산성의 자성(子城)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청호 너머로는 봉수대가 있었던 고리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봉화일처 계족산 동회옥천환산 북진문의소이산(烽火一處 谿足山 東淮沃川環山 北進文義所[伊]山)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회덕현조는 계족산성 봉수대가 동쪽으로는 충북 옥천군 군북면 환평리 고리산 봉수대와 연결되었으며 북쪽으로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해발 200m의 봉화봉 위에 있는 소이산 봉화와 연결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해인 서기 661년 신라는 당나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정복하러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옹산성(계족산성으로 비정)에서 진을 친 백제 부흥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막는다. 김유신은 "성에서 나와 항복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를 기약함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다"라고 회유한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비록 조그만 성이지만 군사와 식량이 모두 넉넉하며, 장수와 병졸이 의롭고 용기가 있으니 차라리 죽도록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고 답하며 창끝과 칼날을 겁내지 않고 싸운다.
싸움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성은 결국 함락되고 만다. 이로써 신라군은 백제 부흥군에 의해 차단된 웅진으로 가는 도로망을 개통시키고 웅진에 주둔 중인 당군에게 식량을 지원하여 주는 보급로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참조)
성을 함락시킨 신라군은 "적의 장수를 잡아 처형하고 그 백성은 놓아주었다"라고 <삼국사기>는 전하지만 싸움의 와중에서 죽어간 병사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동벽 가장 낮은 곳에는 우물지와 저수지가 있다. 벌써 몇 년째 발굴 조사와 더불어 정비 중이다. 아래로 내려가자, 굴착기 2대가 터파기 작업을 하고 있다. 우물지에 사진기를 들이대자 "어디서 왔느냐?"라면서 사진 찍지 말라며 크게 화를 낸다. 얘기 끝에 겨우 한 컷의 사진을 찍었다. 이곳뿐 아니라 왜 유적 수리 현장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것에 그리 과민한지 모를 일이다.
다시 서벽으로 올라와 먼 곳을 조망한다. 계족산성은 통한의 역사가 호수를 만나 행복한 풍경을 이룬 경우다. 웬만한 절경 뺨칠 만큼 풍광이 좋다. 젊은 부부 몇 쌍이 사진을 찍고서 서둘러 내려가 버린다. 기억을 먹고사는 것이 역사라면 그 기억을 되새기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려만….
북벽 근처와 2곳의 건물지가 있으며 서벽 부근에 3곳의 건물지가 있다. 올해는 유난히 잡초가 우거져 가까이 가기에 곤란할 만큼 잡초가 무성하다. 아무래도 올여름의 잦은 비 탓인가 보다.
내가 걷는 발자국에도 저 누군가의 발자국이 포개지리라
북벽에 치우쳐 설치된 서문을 나와 바로 건너편 서쪽 봉우리(해발 229.1m)에 있는 장동산성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계족산성으로부터 불과 300~4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는 장동산성은 동일 능선 위에 가까이 축조돼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계족산성을 외곽에서 호위하기 위한 보루가 아닌가 보인다.
상주 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우술성을 쳐서 1천 명을 목 베었다. - <삼국사기> 본기 문무왕조
우술성은 계족산성으로부터 약 4km가량 서쪽에 있는 평지나 다름없는 얕은 곳에 자리잡은 성이다. 우술군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비정 되는 곳이다. 어쩌면 옹산성 싸움에 진 백제 부흥군 중 일부는 바로 앞 봉우리에 있는 장동산성이나 우술성으로 탈출하여 항전을 계속했는지 모른다.
기념물 등 문화재 지정에서 제외된 장동산성은 관리 부재로 말미암아 성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혹시라도 흔적이 있을까 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지만 말짱 헛일이다. 생뚱맞게도 이곳으로부터 1300여m가량 떨어진 이현동산성의 안내판이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이 잘못은 언제쯤에나 바로잡아지려나.
하릴없이 임도로 내려와 잠시 벤치에 앉아 쉰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다. 하나같이 맨발이다. 요새 유행하는 황토 밟기라는 것인가 보다. 이성부의 시 한 자락이 떠오른다. 내가 걷는 발자국 위에도 저 사람들의 발자국이 포개지리라.
이 길에 옛 일들 서려 있는 것을 보고
이 길에 옛 사람들 발자국 남아 있는 것을 본다
내가 가는 이 발자국도 그 위에 포개지는 것을 본다
하물여 이 길이 앞으로도 늘 새로운 사연들
늘 푸른 새로운 사람들
그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결심하고 마침내 큰 역사 만들어갈 것을 내 알고 있음에랴!
산이 흐르고 나도 따라 흐른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먼 곳으로 우리가 흐른다
- 이성부 시 '그 산에 역사가 있었다 - 내가 걷는 백두대간1' 일부
2007.09.13 17:54 | ⓒ 2007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