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이야1997년 육군소위 임관식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이 사진이 어머니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그립습니다. 어머니!
김동이
시간이 지나고 저는 1997년 7월 1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건강한 모습으로 어머니 앞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우리 아들! 자랑스럽구나. 더 건강해진 거 같네."이렇게 말씀하시며 검게 탄 제 얼굴을 만지시며 이제는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저는 다시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엄마! 이제는 걱정 안하셔도 돼요. 장교니까 자주 나올 수 있을 거야."
"그래! 몸조심하고 나올 땐 미리 전화해라. 맛있는 거 준비해 놓을테니까."
"알았어요! 전화 자주 드릴께요."이렇게 어머니 곁을 떠났고 5년여의 세월이 아무 탈 없이 흘러갔습니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사망소식, 인생의 전환점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목소리는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동생도 말을 잊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왜?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놀라지마! 엄마 돌아가셨대."
"뭐? 확실해. 다시 전화해봐. 확실히 알아보란 말야?"
"지금 병원에서 연락받은 거야. 빨리 내려와. 조치원 ○○병원이래."
"알았어! 금방 갈게."말이 금방이지 동두천에서 근무하는 저는 눈물을 훔치며 옷을 갈아입고, 부대장에게 보고를 하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일단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내달렸습니다. 차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속으로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평생을 착하게 살아오셨는데 그런 일 없을 거야!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 아녀야 해'하며 수없이 되내었습니다.
의정부에 도착한 뒤 내 연락에 놀라 달려온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다시 어머니가 계시다는 조치원 병원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2시간여 걸리는 거리를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것 같았습니다(그 친구는 이후 속도위반 딱지를 뗏다고 합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곧 바로 영안실로 달려갔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아버지와 먼저 온 동생, 친척들이 모두 대성통곡을 하며 저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어쩌면 좋냐? 어떻게 살어?"
"불쌍한 니네 엄마, 어떻게 하니?"이쪽저쪽에서 위로하려고 저에게 다가와 말을 했지만, 이미 충격을 받은 저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자신보다 자식과 가족만을 위해 희생하시다 갑자기 맞이한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저와 가족들은 아무 말 없이 한없는 눈물만 흘려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해서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느덧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5년의 기간 동안 저는 인생의 전환점도 맞이했습니다. 평생 직장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근무했던 군에서 전역을 했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시골집에 갈 때면 어머니께서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맞이해 줄 것만 같습니다.
"밥은 먹고 왔어? 아픈 데는 없구? 얼마나 걸렸니? 차는 안 막히고…."이렇게 잔소리를 하시면서 말이죠.
평생을 남의 베풂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남에게 베풀고만 가신 어머니!
비록 육신은 우리곁을 떠났지만 어머니! 당신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계십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는 베풀지만 마시고 베품을 받으시면서 행복하세요.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어머니! 언제나 당신이 자랑스러워했던 큰아들이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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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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