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은 언제나 마음속에 살아계십니다

어머니 기일 5주년을 맞이하여 바치는 글

등록 2007.09.14 17:29수정 2007.09.1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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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차 조심하고, 감기조심하고, 굶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충남 연기가 고향인 필자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대전으로 유학(?)나와 자취를 하고 있을 때, 시골집에 왔다가 돌아갈 때면 어머니께서는 항상 그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이런 당부를 끝까지 듣다가 한번은 하루에 6대 밖에 들어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놓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한 번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푼 두푼모아 지은 시골집 입을 거 안입고 먹을 거 안먹으시면서 아끼고 아껴서 지은 시골집입니다. 이 집에는 어머니의 피와 땀이 서려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으면 곧 허물어질 집입니다. 행정중심복합도시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은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푼 두푼모아 지은 시골집입을 거 안입고 먹을 거 안먹으시면서 아끼고 아껴서 지은 시골집입니다. 이 집에는 어머니의 피와 땀이 서려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으면 곧 허물어질 집입니다. 행정중심복합도시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은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김동이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한 저는 입대 당시의 기억이 또렷이 생각납니다. 따뜻한 밥을 한 상 가득 차려주시고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려 부엌 한 편에서 눈물을 훔치시던 그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엄마! 왜 또 그래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못 가잖아요?"
"그래두 지금 가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전 남들과는 다르게 장교로 가잖아요. 훈련은 길어도 12주만 기다리시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께요. 그리고 중간에 외박도 있다잖아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몸조심하고, 감기조심하고, 안 다치게 조심하고, 밥 잘 챙겨먹고…."

또 다시 어머니의 잔소리가 길게 이어졌지만 이날만큼은 그 말이 싫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부둥켜 앉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남긴 채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저를 당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그렇게 대해주셨는데, 자취할 때처럼 마음대로 오고갔던 곳도 아니고 이제는 마음대로 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긴 여행(필자는 장교로 군에 입대하여 7년 동안의 군 생활을 하고 전역했습니다)을 떠나려니 어머니의 걱정은 더할 나위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이야 1997년 육군소위 임관식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이 사진이 어머니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그립습니다. 어머니!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이야1997년 육군소위 임관식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이 사진이 어머니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그립습니다. 어머니!김동이

시간이 지나고 저는 1997년 7월 1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건강한 모습으로 어머니 앞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우리 아들! 자랑스럽구나. 더 건강해진 거 같네."

이렇게 말씀하시며 검게 탄 제 얼굴을 만지시며 이제는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저는 다시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엄마! 이제는 걱정 안하셔도 돼요. 장교니까 자주 나올 수 있을 거야."
"그래! 몸조심하고 나올 땐 미리 전화해라. 맛있는 거 준비해 놓을테니까."
"알았어요! 전화 자주 드릴께요."


이렇게 어머니 곁을 떠났고 5년여의 세월이 아무 탈 없이 흘러갔습니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사망소식, 인생의 전환점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목소리는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동생도 말을 잊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왜?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놀라지마! 엄마 돌아가셨대."
"뭐? 확실해. 다시 전화해봐. 확실히 알아보란 말야?"
"지금 병원에서 연락받은 거야. 빨리 내려와. 조치원 ○○병원이래."
"알았어! 금방 갈게."


말이 금방이지 동두천에서 근무하는 저는 눈물을 훔치며 옷을 갈아입고, 부대장에게 보고를 하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일단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내달렸습니다. 차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속으로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평생을 착하게 살아오셨는데 그런 일 없을 거야!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 아녀야 해'하며 수없이 되내었습니다.

의정부에 도착한 뒤 내 연락에 놀라 달려온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다시 어머니가 계시다는 조치원 병원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2시간여 걸리는 거리를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것 같았습니다(그 친구는 이후 속도위반 딱지를 뗏다고 합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곧 바로 영안실로 달려갔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아버지와 먼저 온 동생, 친척들이 모두 대성통곡을 하며 저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어쩌면 좋냐? 어떻게 살어?"
"불쌍한 니네 엄마, 어떻게 하니?"


이쪽저쪽에서 위로하려고 저에게 다가와 말을 했지만, 이미 충격을 받은 저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자신보다 자식과 가족만을 위해 희생하시다 갑자기 맞이한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저와 가족들은 아무 말 없이 한없는 눈물만 흘려야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해서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느덧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5년의 기간 동안 저는 인생의 전환점도 맞이했습니다. 평생 직장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근무했던 군에서 전역을 했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시골집에 갈 때면 어머니께서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맞이해 줄 것만 같습니다.

"밥은 먹고 왔어? 아픈 데는 없구? 얼마나 걸렸니? 차는 안 막히고…."

이렇게 잔소리를 하시면서 말이죠.

평생을 남의 베풂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남에게 베풀고만 가신 어머니!


비록 육신은 우리곁을 떠났지만 어머니! 당신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계십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는 베풀지만 마시고 베품을 받으시면서 행복하세요.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어머니! 언제나 당신이 자랑스러워했던 큰아들이 띄웁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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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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