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안중근기념전>에 전시된 거사 장면을 묘사한 동상.
박권영
그러나 안중근의 거사가 조선만의 독립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의 '동양평화론'을 통해 자세히 드러나 있다. 나아가 그의 이론은 오늘날 한ㆍ중ㆍ일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처한 현실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자신이 구상한 평화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비록 사형 집행으로 '서'(序)와 '전감'(前鑑) 등 서론 부분만 쓰여진 채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중근의 동양평화에 대한 사상적 깊이를 읽어낼 수 있다.
안중근은 구체적으로 △중국 뤼순에 한∙중∙일의 공동참가에 의한 동양평화회의를 상설화하고 △ 동양평화회의 주도로 한·중·일 공동평화군 창설하며 △한·중·일 공동개발은행을 설립, 공동화폐를 발행하고 △동아시아 곳곳에 동양평화회의 지부와 공동은행 지점을 설치할 것을 주창했다. 최근 참여정부를 중심으로 정치권과 학계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안중근은 이미 1세기 전에 제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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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당시 서양제국주의, 특히는 러시아의 침략주의에 공등대응하기 위하여 한ㆍ중ㆍ일 연대이념인 동양주의를 주창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양주의로 역내 일본의 침략주의를 묶어두려고 했다.
이것은 마치 2차대전 후 서유럽이 구소련의 위협에 공동대체하기 위하여 서유럽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통해 독일의 팽창주의를 유럽공동체의 틀로 묶어두려했던 것과 비교된다.
냉전 후 오늘날의 동아시아가 미국의 패권전략에 공동대처하기 위하여 한ㆍ중ㆍ일 연대, 동아시아 공동체가 요청된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 세기를 앞선 동아시아 평화담론이었다.
이에 대해 <안중근, 하얼빈에서의 11일>의 저자이자, 하얼빈 조선족민족사업촉진회장인 서영훈(77)씨는 "그동안 안중근에 대해서 '민족의 원수를 갚은 의사'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지만, 21세기를 맞아 평화의 관점에서 안중근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점에서 안중근은 평화의 선구자"임을 강조했다.
안중근,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 연대를 꿈꾸다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거사 현장을 둘러본 뒤, 우리 일행은 기차를 타고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로 향했다. 3층으로 된 침대칸에서 7시간여를 보낸 뒤 도착한 연길역에서 다시 3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한 곳은 바로 중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3국이 인접한 훈춘시 방천 국경공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