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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A
나는 해방둥이로 태어났지만 이미 국토는 두 조각이 난 뒤였다. 해방정국에서, 6·25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에서 애꿎은 숱한 목숨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던 게 아직도 또렷하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 가고 제대한 지도 30여 년이 더 흘렀고, 그때의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아도 그 휴전선은 사라지기는커녕 한 치도 옴짝달싹 않은 채 여태까지 버티고 있다.
1969년 겨울을 앞두고 내가 근무하던 부대가 전방으로 옮겨갔다. 마침내 이전할 부대가 가까워져 오자 북녘에서 대남방송이 짙은 안갯속에서 점점 크게 울렸다. 그 부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대남방송을 밤낮으로 들으며 지냈다.
OP(관측소)에 올라 북녘 땅을 살펴보면, 북녘 논에도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서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상대를 욕하며,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아픔과 의문을 품었다.
그 뒤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나라와 나라를 여권 하나로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라이면서도 오갈 수 없는 금단의 나라일까 매우 통분했다. 또 하나의 내 조국 북녘의 참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녘 사람을 만나도 보안법 위반이요, 인쇄물을 소지해도 보안법 위반이었다.
북녘의 참모습을 알고 싶었다.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 <또 하나의 조국>, 황석영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는 그런대로 미처 몰랐던 북한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옛말처럼 실제로 가 보는 것만큼이야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겠는가.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