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보는 '교과서 참고자료'를 가리켜 '학습지'라고 합니다. '학습(學習)'은 '배울 학 + 익힐 습'을 쓰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학습지'란, 쉬운 우리 말로 풀면 '배우는 책', '배움책'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사서 본다고 하는 그 학습지들은 우리들한테 얼마나 '배움을 선사하는 책, 배우는 책'이 되고 있을까요.
시험 한 번 치고 나면 버리는 책, 시험점수 높이는 데에만 쓸모가 있는 책, 학교를 마치면 종이뭉치밖에 안 되는 책이 아닐는지요. 학년갈이나 학기갈이를 할 때마다 집밖에 통째로 내놓거나 헌책방에 팔러 가는 종이뭉치는 아닐는지요. 새것으로 온돈 주고 사기 아깝고 헌책방에서 반값쯤에 사도 아깝다고 느끼는 책은 아닐는지요.
참으로 우리들이 '배우는 책'이라 할 때에는, 그 책을 처음 살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하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날까지 늘 곁에 놓고 틈틈이 펼치고 돌아보며 되새길 만한 책이어야 좋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진짜 '배우는 책'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가짜 '배우는 책'에 마음이고 몸이고 푹 길들고 찌들어, 우리 세상도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못 살피면서 어영부영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학습지'를 사서 무언가 배우거나 가르친다고 할 때에 참말로 '무엇'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우리가 배우는 것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려 하나요. 누구한테 쓰는 배움이나 가르침일까요. 어느 때에 쓸까요. 짤막짤막한 지식이나 상식을 잠깐 동안 머리에 담고 시험을 치를 뿐이라면, 이런 앎은 1회용품이지 싶은데.
우리 삶을 가꾸는 일이 아니라, 시간 때우기지 싶은데. 우리들 재주와 슬기는 시험을 치러서 얻는 점수로 잴 수 없잖아요. 요리대회에서 1등을 받은 사람 밥이 가장 맛있고, 예선에 떨어진 사람이 짓는 밥은 가장 맛없을까요. 요리대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랑을 담아 짓는 밥이 참으로 맛있지 않던가요. 100만원짜리 고급스런 상차림이 아니더라도, 고작 3000원어치 찬거리로 나물 몇 가지와 김치 몇 조각 올린 상차림이라도 신나고 맛나게 밥그릇 비울 수 있지 않나요.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은 상차림이라면, 적은 돈으로 차렸든 반찬 몇 가지 못 올렸던, 한결 아름답거나 살갑다고 느낍니다.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지 않았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바치고 겉보기로는 맛깔스러울지 몰라도, 조금도 안 아름답고 안 살갑다고 느낍니다.
책을 볼 때에도 똑같습니다.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은 책 하나가 제 마음을 살찌우고 아름답게 돌본다고 느낍니다. 이런 책은 껍데기나 엮음새가 좀 어설프더라도, 책이름을 퍽 못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낯선 글쓴이가 쓰고 낯선 출판사에서 펴냈다고 해도, 책을 펼쳐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슬픈 줄거리에 눈물이 똑똑 떨어집니다.
하지만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안 담은 책은, 아무리 번들번들 예쁘장하게 보이더라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삶을 밝힌다고 하는 훌륭한 줄거리를 담았다고 내세우더라도 웃음이나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름난 글쟁이가 글쓴이로 이름을 올리고, 아무리 잘 알려진 출판사에서 펴냈으며, 언론사 기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어도 들춰보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옷 한 벌을 입든, 밥 한 그릇을 비우든, 몸뚱이 하나 뉘일 집을 찾든, 언제나 비슷하겠구나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몸과 눈에 맞추며 우리 삶을 살찌울 사랑과 땀과 믿음을 살뜰히 찾는다면, 이런 옷과 밥과 집과 책을 스스로 찾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들이 사랑과 땀과 믿음을 찾기보다는 겉치레와 겉꾸밈에 매여 다른 사람들 눈치와 눈길에 발목잡인다면, 정작 자기 삶을 살찌우는 책은 거들떠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껴안지 못하며 베스트셀러 목록만 더듬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과 머리와 생각에 맞추는 책읽기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 지식수준이나 상식퀴즈 따위에 얽매이는 책읽기로 흘러 버리지 않을까요.
우리한테 즐거울 옷밥집이어야 좋을 텐데, 우리한테 즐거운 책 한 권이어야 반가울 텐데, 우리 몸에 옷밥집을 맞추지 않고, 옷밥집에 우리 몸을 맞춘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 맞추는 책, 우리 꿈에 맞추는 책, 우리 마음에 맞추는 책이어야 좋을 텐데, 책에 따라 우리 삶과 꿈과 마음을 맞추지는 않을까요. 나아가, 자기 삶이 무엇이고 꿈은 무엇이고 마음은 어떠한지를 제대로 못 살피며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요. 잘 팔린다는, 많이 읽힌다는, 남들이 좋다는 책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좋아할 만한 책, 자기 생각을 가다듬을 책, 자기 꿈을 다독이며 살아가도록 이끄는 책은 놓치고 있지 않을까요.
'맞춤책'이라고 해서 '어떠어떠할 때 읽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책을 두루 묶어서 소개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자기계발서'라고 해서 '자기한테 모자란 무엇을 느끼며 어찌어찌 자기 몸가짐과 생각을 추스른다는 책'이 자꾸자꾸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런 책들은 얼마나 '다 다른 어버이가 낳아서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자라난 뒤, 다 다른 생각으로 다 다른 밥을 먹으며 다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알맞춤한 책일까요.
'다 다른 우리들을 얼마나 다 다른 모습으로' 가꾸며 키우는 자기계발 책일까요. 책에 나온 줄거리에 우리를 맞추며 자기를 돌아보고 가꿀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이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살피고 깨닫는 가운데 자기가 미처 못 느낀 자기 모습과 우리 둘레 모습을 헤아릴 책을 찾아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요.
학습지라는 것은 얼마나 배움직한 책일까 함께 생각해 봐요. 아니, 학습지를 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학습지는 우리가 '책하고 멀어지게 하는 걸림돌'은 아닐까요. 학습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학습지를 책상맡에 많이 채우면 많이 채울수록,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참 지식하고는 멀어지고, 우리가 느껴야 할 참 세상하고는 동떨어지며, 우리가 보아야 할 참 내 모습은 잊혀져 버리지 않나요.
시험점수에 맞추는 내 머리나 마음이 아니라, 내 삶에 맞추는 내 머리나 마음이어야지 싶은데. 시험점수야 어찌 되든, 내 갈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면서, 참다운 나를 찾고 가꿀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놀이도 즐겨야 신나고 재미있는 우리 삶으로 꾸릴 수 있지 싶은데. 우리는 초·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교까지 다니고 대학원이나 유학이라는 기나긴 배움을 거치면서도 정작 '나를 가꾸는 배움', '나를 가꾼 뒤 내가 살아갈 이 세상에서 내 꿈을 어떻게 펼치면 좋은가 하는 배움'은 못 느끼거나 안 느끼면서 살지는 않을까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시험점수에 매였다가, 나중에는 차츰 길들고 물들어 아무 생각 없이 학습지에 따라가거나 매이며 자기 모습, 줏대, 뿌리, 줄거리, 바탕을 죄 잃고 있지 싶어요.
2007.09.30 09:40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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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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