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시집 안 간다는 말, 장사치 밑지고 판다는 말, 노인 얼른 죽어야지 하는 말을 3대 거짓말이라고들 한다. 거짓말인 경우가 많긴 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이 말에 어찌 진실이 없을 것인가? 여자라고 반드시 시집을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 안 간다는 말이 거짓일 수만은 없고, 장사하면서 물건을 떼 온 값에 자기 품삯 정도는 더해야 원가가 되니 물건을 떼 온 값 이상으로 판다 하여 밑지지 않는 게 아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얼른 죽어야지.” 하시는 말씀은 어떤 때에는 엄숙하기까지 하다. 어찌 거짓말이라 가벼이 여길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거짓말보다 더한 거짓말은 아마도 직장인들이 퇴근하면서 하는 “딱 한 잔”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죽음으로써 이승의 삶이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죽음을 어떻게 맞고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고 어쩌면 삶의 가장 진지한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살려면 잘 죽어야 하고 잘 죽는 사람은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바 가치를 실현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죽는 것,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떠나는 것, 남는 사람들에게 한을 남기거나 짐을 지우지 않고 죽음으로 오히려 화해에 이르게 하고 떠나는 것은 잘 죽음의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종교인들의 경우는 다른 차원의 덕목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죽음의 의미를 잊고서는 삶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잘 사는 것도 배워야 하지만 잘 죽는 것도 배워야 한다.
자연스러운 죽음의 학습공간
"얼른 죽어야지"라는 노인들의 말은 상당 부분 진실이라고 믿는다. 늙어 자식들에게 짐만 되거나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어느 날 잠자듯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노인들의 마음은 숭고하게 느껴진다.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곡기를 끊고 속까지 다 비운 채 죽음을 택하는 모습은 거룩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죽음의 모습은 일생을 통하여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 결과라 생각한다. 종교를 신앙한다는 것도 그러한 차원을 만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종교를 믿지 않으면서도 죽음 앞에 의연할 수 있음은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그 원인이 상당 정도는 생활공간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이의 무덤이 산 자의 생활공간 안에 존재하는 시골마을의 공간구조는 산 사람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집을 나서 논과 밭으로 가면서 조상님들의 묘를 지나고 산 자에게 얘기하듯 조상님을 만나는 생활을 통해 죽음이 삶 깊이 자리 잡게 된다고 생각한다. 마을 뒤의 무덤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잔디 깔린 운동장이다.
자신도 죽으면 저렇듯 무덤을 이루고 자손들이 얘길 걸어줄 것이라 믿고, 죽음이 삶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른 모습임을 깨닫고 살게 되는 것이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와 차례를 통해서도 죽음과 삶이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교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분들이 죽음을 대하는 것은 죽음을 공포로 느끼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조상의 반열에 드는 것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면 도시에서 죽음의 자취를 찾기란 매우 힘들다. 도시에서 죽음은 매우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공동묘지는 음습하고 처녀귀신이 나오는 장소이다. 비 오고 흐린 평일에 한산한 공동묘지에 택시기사들도 가길 꺼린다. 시골이라고 무섭지 않을까만 도시에서 그 분위기는 유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도시의 생활공간에서 죽음을 거의 접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게 도시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도시에서는 죽음을 배제하고 있다.
병원은 사람이 치료받는 곳이긴 하지만, 치료가 된 사람은 병원 정문으로 퇴원하고 치료가 되지 않은 사람은 지하실을 통해 큰(?) 차타고 길을 나선다. 분명 살아 병원 문을 나서는 사람과 죽어 문을 나서는 사람이 있지만 죽어 나가는 사람의 모습은 애써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몇 년 전만 해도 아파트에서도 상가(喪家)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장례식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주변 주민들의 항의로 장례식장은 대부분 지하에 자릴 잡는다. 생활 속에서 상시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충격과 함께 죽음을 만난다. 송장을 태우는 화장장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만들지 않으려 한다. 어느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화장장은 다른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요금을 대폭 인상한다고 한다.
죽음을 혐오스럽게 생각하면 죽음의 자리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죽음을 생각지 않고 삶이 있을 수 없을 텐데, 도시의 삶은 그만큼 종교적 차원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종교가 그 자리를 상당 부분 메우고 있겠지만 말이다.
납골묘 설치에 반대하는 주민들
얼마 전 천주교 추기경이 탄 차가 어느 성당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의 계란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성당에서 건설 중인 납골묘에 대해 항의한 것이라 한다. 초·중등학교가 부근에 있다던가? 그들에게 납골묘가 그렇게 혐오스러운 것이었을까? 납골묘가 가까이 있다고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는가? 집값 떨어진다는 이유 말고 다른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지 궁금하다.
기독교 교회나 천주교 성당에서 내걸고 있는 십자가는 2천 년 전 한 청년을 처형한 형틀이었음을, 그것도 시뻘건 피를 흘리며 죽었음을 기억하고자 붉은 빛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하면 십자가라는 상징을 바라보는 마음이 단순할 리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종교란 본래 삶과 죽음에 관한 가르침이자 믿음임을 떠올린다면 죽은 이들의 남은 흔적인 뼛가루를 종교시설 안에 모신다 하여 무엇이 그리도 문제가 되는 것일지? 납골묘 부근에 있는 학교의 학생들은 오히려 훌륭한 철학적·종교적 품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계란은 먹는 것이지 차나 사람에게 던지는 게 아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천박한 자본주의와 경박한 행태를 경험하는 것은 멀리는 이러한 죽음의 부재에서도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강하고 화려하고 풍부하고 밝은 것만을 추구하는 도시의 문화는 약한 것, 힘겨운 것, 모자란 것, 어두운 것을 감춘다.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에도 반은 집 없는 사람들이 살지만, 드러나는 것은 돈의 화려함뿐이다. 영원할 수도 없고,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는 이러한 문화를 바꾸는 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자각을 위해서 생활공간 안에 그러한 자리를 마련하여야 한다. 가장 확실한 것이 죽음을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묘지이다. 이렇게 보면 묘지, 화장장은 오히려 도시에 필요한 시설이다. 몇 년 전부터 서울시가 추진해오는 묘지공원사업은 답보상태이고, 간혹 설치되는 시내 납골시설조차 민원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분명 반성하여야 한다. 물론 잘 때까지 곡소리 들리는 걸 방임하자거나 검은 연기 풍기는 걸 무작정 허용하자는 게 아니다.
죽음의 공간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친근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내에 있는 묘지를 한가로이 산책하면서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나아가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의 차원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맹모삼천지교처럼 사는 환경에 따라 사람 사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라 하니, 죽음을 생각하고 살 수 있다면 종교적, 철학적 삶이 더욱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맹자 역시 공동묘지 가까이서 살았던 경험이 그의 사상형성에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 살려면 잘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멀리 하면 삶도 멀리 있는 게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송기춘 교수는 전북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0.10 16:52 | ⓒ 2007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