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류 가야금산조 인간문화재 이영희 명인
국악협회
한 달 보름 전 가야금전수관 문제로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가 계단서 굴러 갈비뼈가 부러지고, 피가 고이는 등 큰 부상을 입었지만 고통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하객들을 잔잔한 미소로 맞은 이영희 선생은 막상 소감 한 마디 묻자 손도 들지 못하고 고개만 겨우 저을 정도로 힘겨워 보였다. 국악협회 이사장으로서 국악행정을 도맡아 해온 지난 세월 동안은 선생의 연주를 자주 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비록 짧은 산조나마 큰 기대를 건 이가 적지 않을 터, 적잖이 연주가 걱정되었다.
국악 공연장으로서는 가장 큰 극장인 국립국악원 예악당이 로비부터 객석까지 잔치분위기 물씬 묻어나 그저 구경꾼도 괜히 덩달아 들뜨게 되기도 했다. 마침내 객석이 어두워지고 무대 막이 올랐다. 간단한 영상으로 선생에 대해 묘사하고는 정화영 고수의 장단에 맞춰 선생의 간만에 보는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가 시작되었다.
사실 너른 공연장인 예악당은 산조를 감상하기에는 적당치 못한 곳이다. 또한 산조의 참맛인 농현을 그것도 평소 선생이 지켜온 원리대로의 농현은 이미 부상으로 인해 완벽히 보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막상 연주가 시작되고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 전바탕 산조를 모두 연주를 들은 듯 가슴에 뭉클한 무언가가 숨통을 틀어막았다.
이영희 선생의 가야금 산조는 특히 농현의 진수를 보인다. 누를 때에는 태산이 일거에 허물어지듯 벼락처럼 온 힘을 왼손가락에 몰아넣고 이내 좀 전의 단호함은 짐짓 모르는 체 모든 힘을 추스려 명주실 켜켜이 꼬아 만든 가야금줄의 신비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날 연주에서도 비록 맛만 보인 짧은 산조였으나 70 연세에도 불구하고 한 음 한 음 여유로움과 긴장을 놓치지 않아 듣는 이를 너른 들판에서 시작하여 심산유곡의 몰아경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14살에 처음 그 줄들 위에 손을 얹어 박절하게 따지자면 56년 넉넉하게 말해서 60년을 그 위를 하루도 떠난 적이 없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예로부터 장단에 죽고 사는 우리음악이지만 진정 득음의 경지에 서게 되는 명인은 그 장단 위에 존재한다 하여 ‘장단을 갖고 논다’는 말로 그 음악적 깊이를 표현했다.
이날 불과 몇 분의 간략한 연주였지만 이영희 선생의 무대에 선 모습만으로도 ‘장단 위의 장단’, ‘종심의 연주’를 느끼게 하였다. 평생을 함께 울고 울었을 열 손가락과 열두 줄의 가야금은 견우와 직녀가 만난 듯 오랫동안 감춰왔던 열두 줄의 신비를 스스럼 없이 드러냈고, 한 음 한 음들은 올처럼 알알이 엮여 산조의 이름을 직조하였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분명 국악인은 아닌 얼굴의 한 중년사내가 선생의 연주에 처음부터 끝까지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는 장단을 따라 짚는 조용한 열광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참으로 간만에 산조에 대한 깊은 감흥을 준 선생의 연주가 손님들에 대한 예로 보여진 후는 국악계 후배들의 축하연주가 이어졌다. 그 모습들도 하나같이 명인이요, 독보적이었다. 무대 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객석 또한 전국에서 선생의 종심을 축하하기 위해 상경한 얼굴들로 가득했다.
선생의 가야금 제자들 24명이 연주한 줄풍류,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집 센 단체라고 볼 수 있는 강정숙 가야금병창단의 병창, 임이조의 한량무, 양길순의 소고무와 진유림의 흥춤. 그리고 이춘희 김영임 이금미의 경기민요, 김광숙 이춘목의 서도민요, 신영희 강정숙 김차경의 남도민요. 마지막 이광수의 풍물로 판을 열고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