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사람들
묘지의 반대편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면서 붉게 물든 단풍을 가까이서 보았다. 붉나무, 개옻나무, 자작나무 등등. 자신의 본래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곱게 물든 잎도 있었지만, 벌레 먹은 자국이 있는 잎들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나뭇잎이벌레 먹어서 예쁘다.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 시 ' 벌레 먹은 나뭇잎' 전문이생진은 김현승 시인(1913~1975)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2001년도에 낸<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집으로 제주도 명예 도민증을 받기도 했을 만큼 평생동안 바다와 섬을 소재로 시를 썼다. 내가 볼 땐 그에게는 제주도 명예 도민증보다는 해양수산부 명의로 된 도민증(島民證)을 줬어야 마땅하다.
시 '벌레 먹은 나뭇잎'은 1999년에 나온 시집 <시인과 갈매기>에 수록돼 있다. 섬이나 바다 아닌 나뭇잎을 소재로 쓴 시가 생소할 지경이다. 시인은 어떤 수종의 나뭇잎을 보고 시를 썼던 것일까. 시인 자신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나무의 잎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나는 개옻나무 아니면 붉나무 잎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측한다. 가을에 가장 빨갛고 고운 단풍을 자랑하는 것이 두 나무의 잎이다. 이 두 나무 가운데서도 더욱 신빙성이 있는 것은 붉나무가 아닐까 싶다. 붉나무의 나무껍질은 회갈색이며 상처를 주면 흰 수액이 흘러나온다. 잎에는 오배자라는 벌레집이 달렸다. 붉나무는 벌레를 키우는 나무인 것이다.
어느 날, 시인은 우연히 나뭇잎에 난 구멍을 발견한다. 벌레가 뜯어 먹었던 흔적이다. 시인은 그 상처를 보고 "예쁘다"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선 미안했던지 슬그머니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물론) 잘못인 줄 안다"라고 덧붙인다. 상처가 난 것을 보고는 "아프겠구나"라고 위로하거나 상처에 직접 약을 발라줘야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뭇잎에 난 상처는 벌레를 먹여 살린 흔적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상처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흔적이다. 이 이타의 흔적 앞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잘못을 무릅쓴다. 그 상처를 두고 "별처럼 아름답다"라고 감탄하는 것이다. 시인이란 모름지기 감탄하는 자이다. 세상을 보고 감탄을 그친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기를 포기한 자이다.
그러나 나는 시인의 '처럼'이란 동급의 비유에 딴죽을 건다. 어찌 아름다움에서 나뭇잎이 별과 동급밖에 되지 않겠는가. 나뭇잎은 하늘에서 아스라이, 객관적으로 빛날 뿐인 별과는 달리 이 지상에서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 살면서 기꺼이 벌레들의 먹잇감이 돼준다. 그러기에 나는 감히 나뭇잎이 아름다움에서 별보다 몇 길 위에 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눈 크게 뜨고 들여다보면, 사람들에겐 누구에게나 몇 군데 상처가 있다. "남을 먹여 가며 살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상처가 없겠는가. 이 깊어가는 가을에 한 시인이 던지는 위로의 말을 곱게 접어 마음의 갈피에다 꽂아둔다. 사람은 누구나 벌레 먹은 나뭇잎이다. 그래서 이 가을, 그대라는 존재는 그렇게 사무치게 아름다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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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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