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 1935년 일제시기 대광장(현재의 중산광장)1935년 일제시기 대광장(현재의 중산광장)
요녕인민출판사(대련근백년풍운도록)
일제시기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항일 투쟁을 하였다. 당시 대련에서는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2명의 인물이 감옥에서 쓸쓸히 사라져 갔다. 그 한 명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안중근으로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이듬해 3월 여순감옥에서 처형을 당했다.
다른 한 명은 한국에 무정부주의자로 잘 알려진 이회영으로, 그는 일제시기 만주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북경과 상하이 등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이회영은 1932년 길림성에 지하공작망을 조직하기 위해 먼저 대련항에 도착하였는데 밀정의 첩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서 고문으로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한국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련이 공식적으로 한중수교를 통해 한국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였다. 모택동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등소평이 집권하면서 중국은 개혁 개방 정책을 펼쳤지만, 최초로 외국투자의 문호를 개방한 것은 1980년부터 광동성, 복건성을 비롯한 중국 남쪽에 치중되었다.
산동성과 요녕성이 개방된 것은 공식적으로 1988년부터이다. 반면, 중국과 일본의 수교는 1972년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인들은 1988년 이전부터 대련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 기업가의 대련 진출은 역사적 요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 JETRO 야부구치 마사키 대련 사무소장은 “일제시절 대련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에겐 당시 사귀어둔 중국인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일본기업의 든든한 인적 네트워크가 돼줬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인들은 타지역에 비해 대련에 신뢰감과 친근감을 더 느끼게 됐습니다. 또 일제시절 대련 시내에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일본에 대한 인상도 좋은 편입니다” 라고 말한다.
일본인 풍경 거리로 지정되어 있는 남산 일대가 과거에 일본 상류층이 살았던 곳으로 현재 그 주변에 일본인 상대의 음식점, 클럽 등이 많은 것도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등소평의 개혁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중국 사회는 내부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현재 대련에 한국 사람들이 방문하여 느끼는 시장경제는 불과 20년도 되지 않은 중국 내에서 새롭게 등장한 현상이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일상에서 중국 인민들이 겪은 변화는 더 크다. 현재 진출한 기업들이 상대를 하는 40대, 50대 중국인들은 과거 사회주의 시절을 거치면서 엄청난 전환기를 헤쳐나온 사람들이다. 문화 혁명시절에는 순식간에 부자, 교육 받은 사람들이 비난을 받았고 가난한 자, 육체 노동자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당시 그들이 느꼈을 혼란을 상상해 보라!
본 '대련 역사 문화 기행'은 대련에 있는 한국인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역사와 중국인 삶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 보탬이 되고자 기획되었다. 대련에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각자가 대련과 일종의 "연분이 있어서 유연분(有缘分)"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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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중국 동북 대련을 찾아 떠나는 역사 문화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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