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중국 동북 대련을 찾아 떠나는 역사 문화 기행

등록 2007.10.29 15:32수정 2007.10.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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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 요녕성에 위치한 대련은 한국인에게 멀고도 가까운 곳이다. 중국어, 중국 음식, 중국 문화는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통상적인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지리상으로는 인천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주도 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2006년 하반기부터 국내 항공사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과거보다 수월하게 대련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인(상)회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만 해도 약 2만명으로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적지 않다.


대련지역 4개 고구려 산성 허명강(중국 역사학자) 논문
대련지역 4개 고구려 산성허명강(중국 역사학자) 논문허명강

대련은 우리 역사와도 여러 면에서 관계가 깊다. 대련을 포함한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광개토왕 14년(404년)부터 265년 동안 지배를 했던 곳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요동성에 속하였는데, 비교적 규모가 큰 4개의 산성이 있었다.

중국 학자 허명강에 의하면, 금주구 대흑산에는 비사성(卑沙城), 보란점시에는 외패산성(巍覇山城), 와방점시에는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 그리고 장하시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 고구려 당시에 축조되어 현재까지 그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한다.

러일 전쟁 당시 여순을 공격하고 있는 일본 군함 러일 전쟁 당시 여순을 공격하고 있는 일본 군함
러일 전쟁 당시 여순을 공격하고 있는 일본 군함러일 전쟁 당시 여순을 공격하고 있는 일본 군함요녕인민출판사(대련근백년풍운도록)

근대는 한국이나 중국에 있어서 시련의 시기였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은 중국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대련의 경우 특히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을 벌이면서 서로 차지하려 했던 곳이다.

동북에서 하얼빈·심양·장춘·대련이라는 4개 도시가 식민지 시기에 중점적으로 건설되었는데, 하얼빈과 대련은 과거 중국 역사적 전승을 가지고 있던 공간이 아닌 새로운 계획도시로 탄생하였다.

초기 러시아가 하얼빈과 대련의 도시 건설을 주도하였고, 이후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일본이 대련 도시 개발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그 이후 40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이루어졌지만 대련에서의 일본 지배는 중국 내에서 가장 오랜 기간을 차지하였다.
대련 1935년 일제시기 대광장(현재의 중산광장) 1935년 일제시기 대광장(현재의 중산광장)
대련 1935년 일제시기 대광장(현재의 중산광장)1935년 일제시기 대광장(현재의 중산광장)요녕인민출판사(대련근백년풍운도록)

일제시기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항일 투쟁을 하였다. 당시 대련에서는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2명의 인물이 감옥에서 쓸쓸히 사라져 갔다. 그 한 명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안중근으로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이듬해 3월 여순감옥에서 처형을 당했다.


다른 한 명은 한국에 무정부주의자로 잘 알려진 이회영으로, 그는 일제시기 만주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북경과 상하이 등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이회영은 1932년 길림성에 지하공작망을 조직하기 위해 먼저 대련항에 도착하였는데 밀정의 첩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서 고문으로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한국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련이 공식적으로 한중수교를 통해 한국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였다. 모택동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등소평이 집권하면서 중국은 개혁 개방 정책을 펼쳤지만, 최초로 외국투자의 문호를 개방한 것은 1980년부터 광동성, 복건성을 비롯한 중국 남쪽에 치중되었다.


산동성과 요녕성이 개방된 것은 공식적으로 1988년부터이다. 반면, 중국과 일본의 수교는 1972년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인들은 1988년 이전부터 대련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 기업가의 대련 진출은 역사적 요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 JETRO 야부구치 마사키 대련 사무소장은 “일제시절 대련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에겐 당시 사귀어둔 중국인 친구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일본기업의 든든한 인적 네트워크가 돼줬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인들은 타지역에 비해 대련에 신뢰감과 친근감을 더 느끼게 됐습니다. 또 일제시절 대련 시내에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일본에 대한 인상도 좋은 편입니다” 라고 말한다. 

일본인 풍경 거리로 지정되어 있는 남산 일대가 과거에 일본 상류층이 살았던 곳으로 현재 그 주변에 일본인 상대의 음식점, 클럽 등이 많은 것도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등소평의 개혁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중국 사회는 내부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현재 대련에 한국 사람들이 방문하여 느끼는 시장경제는 불과 20년도 되지 않은 중국 내에서 새롭게 등장한 현상이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일상에서 중국 인민들이 겪은 변화는 더 크다. 현재 진출한 기업들이 상대를 하는 40대, 50대 중국인들은 과거 사회주의 시절을 거치면서 엄청난 전환기를 헤쳐나온 사람들이다. 문화 혁명시절에는 순식간에 부자, 교육 받은 사람들이 비난을 받았고 가난한 자, 육체 노동자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당시 그들이 느꼈을 혼란을 상상해 보라!

본 '대련 역사 문화 기행'은 대련에 있는 한국인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도시의 역사와 중국인 삶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 보탬이 되고자 기획되었다. 대련에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각자가 대련과 일종의 "연분이 있어서 유연분(有缘分)"이 아닐까?
#대련 #러일전쟁 #고구려산성 #여순 #요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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