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전 총재는 한나라당을 처음 만들었다.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 중 태조에 해당한다. 박근혜 전 대표는 세종대왕 정도 되고, 저는 아마 문종쯤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태조가 나라에 등돌리고 반대편에 서서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회창 전 총재께서 좋은 결정을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강재섭 대표, 6일 오후 경기도 광명시 한나라당 당원교육에서)
"통합신당이나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과거 허물에 대해 함부로 말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 전 총재가 정계를 떠난 뒤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한나라당의 역사를 놓고보면 엄연히 '태상왕' 같은 존재다. 그의 출마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 전 총재와의 인연 때문에 인간적인 고민이 없을 수 없다." (영남권의 영남의 재선의원 A씨)
그런데 어떡하죠? '태조'는 나라(?)에 등돌리고 반대편에 서서 싸울 것을 결심하고 선언했습니다. 한나라당 자체가 '나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저 우려는 현실이 된거죠.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왕년의 인기사극 <용의 눈물>을 보신 분이라면 특히나 기억날 것입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주도하며 형제들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에 실망한 태조 이성계가, 태종이 보내는 '환궁 권유 차사(差使)'들을 모두 활로 쏘아죽였다는 야사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소설가 김진명은 "태상왕에게 보내는 차사라면 유명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기록에 남은 이름들이 없다"는 점에서 착안해 "오히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아버지의 옛 부하들을 모두 죽인 것"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 본인이 직접 '차사'가 돼 이회창 전 총재의 자택을 찾아갔지만, 만나는 것은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자택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간 것"이라는 소문도 있나보던데, 정말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 전 총재를 보면서 <용의 눈물>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1403년에 일어난 '조사의의 난'의 실질적인 주도자를 태조 이성계로 묘사합니다. '조사의'는 태조 이성계의 후비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써, 태종 이방원이 강씨의 자식들을 모두 죽인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반란 시점이 마침 태조 이성계의 동북면 행차와 맞물림으로써, <용의 눈물>은 태조 이성계를 '실질적인 주도자'로 묘사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창업자'가 스스로 만든 왕국을 뒤엎기 위해 행동을 결심한 예는 2차례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함께, 후백제의 견훤이 바로 그 예입니다. 견훤은, 자신의 넷째 아들 금강을 살해하면서까지 왕위를 탐낸 맏아들 신검에 대항하기 위해 놀랍게도 '라이벌'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했고, 그 스스로 후백제 원정군에 참여했던 보기드문 사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회창 전 총재가 '태상왕'이라면, 이제 '이성계'와 '견훤', 그리고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민주당을 깨면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친위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친위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우리 역사상 두번째 사례로 기억되든가, 셋 중 하나의 길이 기다리고 있겠죠.
현실적으로는, "3기 좌파 정권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발언으로 봤을 때 '견훤'의 길을 걸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남은 경우의 수는 둘 중 하나죠. 이성계의 '화해'와 친위 쿠데타의 성공입니다.
"3기 좌파 정권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의 속내는?
이회창 전 총재가 지난 5년간 국제 관련 뉴스나 대북 관련 뉴스를 보수언론에만 의지해 관찰하지 않은 한, "3기 좌파정권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본심이 아닐 것입니다.
'윈-윈 전략'이 어긋난 부시 정권의 대외 전략, 그리고 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는 자체에 '대북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선결조건이라는 것이 달려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대북정책 전반으로 보나, 우리 시대의 시대적 요구로 보나, 때 아닌 색깔 논쟁으로 '퍼주기' 타령을 앞세우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입니다. 미국 내의 한반도 전문가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2002년 12월 12일에,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상호주의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북한이 받기만 하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북한은 매우 값비싼 영변의 핵시설을 포기했고,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도 동결했다. 북한은 상호주의에 응할 준비가 돼 있고, 또 그렇게 해왔다. 남한과의 관계에서도 다를 게 없다. 정상회담이나 금강산 관광을 그런 틀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은 상호주의를 위해 지불할 '돈'은 없지만, 대신 '정책의 변화'를 보여줬다"
지난 10월 19일에는 미국 노틸러스연구소 온라인 정책포럼에 게재한 <김정일, 부시와 맞서 이기다>라는 칼럼을 통해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전면 거부하며 고집스런 정책을 펼쳤지만 북한이 미사일과 핵실험을 잇따라 강행한 후 결국 북한과 협상에 나섰다"고 평가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시 행정부가 2002년 9월 '악의 축'으로 규정한 국가에 대해 선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고 공개 천명한 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참모진은 미국 측에 한국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공격한다면 한ㆍ미 동맹은 파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소개도 했다고 합니다.
이 '2기 좌파 정권'이 부시 행정부의 북폭을 방관했더라면, 한반도는 어떻게 됐을까요? 한나라당이 괜히 '한반도 평화비전'을 발표한게 아닙니다. 동북아의 정세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한나라당조차도 외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정도도 모를 이회창 전 총재가 아닙니다.
결국, 이회창 전 총재는 '구태'를 선보인 것입니다. 낡은 '색깔 논쟁'을 유도하면서, 50대 이상 노년의 유권자들로부터 '표밭'을 일구고 자신의 '대 이명박 전선'에 명분을 주기 위해 던진 '실 없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5년간 정계에서 떠나 있던 사람이 갑자기 경제정책이나 교육정책을 연구해 내놓기는 어렵습니다. 이회창 전 총재는 지금으로서는 이 '실 없는 소리'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회창, 'BBK 의혹'의 수혜자 자리를 노리다?
조만간 김경준씨가 귀국한다는 것도 유심히 지켜봤을 것입니다. 이명박 후보를 향한 '불안한 후보'라는 평은, 사실 '대북 정책'보다는 여기에 중점을 두었을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이명박 후보가 김경준씨의 주가조작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경우에는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다 해도 뇌관은 남아 있습니다. 범여권에서는 이럴 경우, 이명박 후보를 향해 "새파랗게 어린 사람에게 사기당하고 돈을 떼먹힌 사람에게 국가를 맡길 수 있겠느냐"는 주장을 전개할 것입니다. '김경준'과 'BBK 의혹'는 어떻게든 이명박 후보에게는 악재입니다.
최고의 재판관 출신으로서, 이회창 전 총재는 누구보다 'BBK 의혹'을 날카롭게 짚어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김경준씨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지만, 이회창 전 총재는 관련된 법적 판단을 다 마쳤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무소속 대선출마'를 강행했다는 사실은, '이명박'과 'BBK 의혹'의 상관관계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동안 대통합민주신당은 김경준씨의 귀국이 이뤄지면서 이명박 후보를 향해 'BBK 의혹'을 전면폭격한다면, 그의 지지율이 갈 곳을 잃고 무너질 것이라고 봤을 듯합니다. 박근혜 전 대표라는 대안은 법적으로 출마가 막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표들이 범여권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겠죠.
하지만, '이회창' 앞에서는 이 시나리오는 '꿈'에 불과합니다. '스페어 후보론'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죠.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이회창 전 총재를 '김대업의 피해자'로 보는만큼, 이명박 후보가 무너진다면 이 표는 '이회창'에게 갈 것입니다. 사안에 따라 이명박 후보가 심지어 낙마까지 한다면,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전 총재의 '복귀'를 간청할 수도 있습니다.
범여권에서 후보단일화를 이룬다 할지라도, 이 상황에서는 '이풍'을 이겨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출마선언을 공식적으로 하기도 전에 여론조사 지지율이 20%로 넘은 현실, 무관심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찍을 사람도 없긴 매한가지인데 차라리 이회창"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신당 창당'이나 '국민중심당 가담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배제'한만큼, '무소속 대선출마'를 강행한다면, 그렇듯 바깥에서 한나라당을 압박하면서 'BBK 의혹 여파'를 노리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회창 전 총재는 '무소속 대선출마'로써 '지지자들의 범여권 이탈'을 막아내고, '이명박 압박'을 동시에 시도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회창'의 아킬레스 건은 무엇일까
때 마침 터진 '삼성 비자금 의혹'은 '금산분리 완화'를 언급한 이명박 후보에게도 악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자금 의혹'이 2002 대선자금으로까지 번지면, 이회창 후보로서도 결코 안전한 상황이 아닙니다.
물론 이회창 전 총재 본인은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다면 언론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만 해도 다시 심판대에 오를 것입니다. 심지어 한나라당에서도 그가 공식 출마 선언을 하자마자 '차떼기'를 이야기합니다.
그의 속셈과는 달리, 때 마침 터진 '삼성 비자금 의혹'과 함께, 어떻게든 이회창 전 총재를 공격해야 하는 한나라당의 공격과 맞물려 '자중지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이명박 후보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나중에 이회창 전 총재를 '옹립'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포격을 아끼지 않아야 할 상황입니다.
한나라당은 지금 '차떼기 의혹'을 다시 거론함으로써,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한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착각'입니다. 자중지란에 빠져 자신들의 허물을 스스로 들춰내 내부의 싸움을 확산시키는 추한 꼴이 연출될 것입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했다지만, 현직 대통령으로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노무현'보다는 당장 '정권 획득'이 바쁜 한나라당에 더 시선이 맞춰질 듯합니다. 게다가, 밝혀진 '규모'에 있어서도 한나라당이 더 불리한 상황이죠. '차떼기 주역'이라는 최돈웅 전 의원을 슬그머니 선대위 고문으로 위촉했다가 대대적인 포격을 맞았다는 것, 기억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회창 전 총재는 정책이 거의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10년'을 믿을 사람은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자 밖에 없으며, 이미 이명박 후보 측에서 충분히 써먹은 표현입니다. 설마, 5년 전 공약을 다시 내놓을 리는 없을텐데, 과연 40여 일동안 무엇을 준비해 어떻게 보여줄지, 이게 가장 문제일 것입니다. TV토론에 나와서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앉아있을 수는 없을테니까요.
'이회창 대선출마', 정치공학의 비극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정치공학'이라는 수 읽기의 묘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정치를 오랫동안 하다보면 이 늪에 완전히 빠져, 자신의 현실을 냉철하게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잃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회창 전 총재는 '이명박의 위기'라는 현실을 호재 삼아 자신의 등장으로써 '일거양득'을 노리려는 정치공학을 설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출마는 '야권의 리더쉽 부재와 암투'를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시인한 꼴이 됐으며, 경제 정책과 대북 정책의 현실도 모른 채 '흘러간 노래'만 부르면 표가 알아서 모일 것이라는 발상을 했다는 점을 시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회창 무소속 대선출마'는 이명박 후보나 범여권의 세 후보, 모두에게 '위기'로 작용합니다. 모든 후보들이 골고루 지지기반을 잠식당했습니다. 무관심 유권자층의 눈도 아무래도 이회창 전 총재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큽니다. 이럴 때일수록, 기존 대선후보들은 '정책 토론'을 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회창 전 총재의 결정적인 단점은 다름아닌 '정책의 부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공학 노림수'와 '색깔 논쟁'만으로 부각돼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믿음은, 장기적으로 우리 정치 발전에 해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40여 일 동안, 후보자들의 '정책 토론'이 더더욱 활발해지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1.07 20:39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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