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체스판>에서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는 “지금까지 그 어떤 제국도 군사·경제·기술·문화라는 네 가지 면에서 미국처럼 결정적인 힘을 가진 적은 없었다”라면서 미국이 신고립주의에 빠지지 말고 계속해서 세계적 역할을 수행해 나가기를 희망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2002년에 열린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미국의 국가목표는 항상 자국 방어 이상의 것을 추구해 왔다”면서 “미국은 세계만방에 자유와 개방을 장려함으로써 평화를 증진하고자 한다”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미국은 기우는 태양”이라고들 말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미국이 향후 장기간 계속해서 세계패권을 향유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이 여전히 세계경제의 중심이라는 사실과, 최근 수년간 미국이 아프간·이라크에서 압도적 전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그 같은 전망의 근거가 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이 정치·경제·군사·문화·기술 등의 제(諸)방면에서 세계패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미국의 세계패권은 더욱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전성기의 대제국이 일순간에 갑자기 ‘요절’할 수도 있다는 것은 14~16세기 명 제국의 경험에서도 잘 드러난다.
명 제국은 도자기·차·비단 등 핵심 수출품목을 바탕으로 14~16세기의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명 제국은 세계경제의 중심이었고, 중심 화폐인 은도 명 제국으로 몰려들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기 23년 전인 1621년에 어느 포르투갈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사 저널> 56권에 실린 리처드 폰 글랜의 논문 ‘17세기 중국 금융위기의 신화와 실제’에서 인용된 말이다.
“세계를 배회하던 은이 중국으로 들어가면 마치 그곳이 자연적인 중심이라도 되는 듯이 그냥 머물러 있다.”
화폐(은)는 돌고 돌아야 하는데, 그것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밖으로 나올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만큼 명 제국의 수출이 압도적인 데 비해, 서양 국가들은 마땅히 판매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 시기에는 해외에서 은이 대대적으로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경지면적이 증대되고 수공업이 발달하는 한편으로 도시화도 지속적으로 진전되었다. 멸망하기 전까지도 명 제국의 경제에는 표면상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멸망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나라의 군사력에서는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의 명 제국 황제인 만력제 때에는 보하이 반란(1592년), 임진왜란(1592~1599년), 양응덕 반란(1597년)에 모두 군대를 파견했지만, 전성기의 명제국은 겉으로는 피곤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세 개의 주요 병란으로부터 제국을 지켰으니, 명 제국은 요즘 말로 하면 윈-윈-윈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미국이 윈-윈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전성기의 명 제국은 미국 못지않은 또는 미국을 능가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만 해도 거의 동시에 세 개의 전역(戰域)을 소화해낼 수 있을 정도로 강성했던 명 제국은, 그래서 임란 이후의 조선 지배층에게 영원한 충성 대상으로 여겨졌던 명 제국은, 임란 이후 얼마 안 가서 급속도로 약해지다가 동북방의 여진족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1644년). 세계의 중심국가가 후진적인 여진족에게 멸망했으니,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그럼, 명 제국은 왜 이렇게 허망하게 멸망한 것일까? 임진왜란 때문에 멸망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지만, 임진왜란은 기본적으로 조명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에 피와 군수물자의 대부분을 흘린 쪽은 명 제국이 아니라 조선이었다. 물론 명 제국도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루기는 했지만, 그것이 명 제국의 멸망에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명 제국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사회적 발달을 뒷받침할 만한 통치 시스템을 구축·유지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관이 민의 발달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데에 근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무역흑자로 인해 민간 경제는 발달했지만, 명 제국의 조세체계는 민간의 부를 관(官)으로 흡수하는 데에 역부족이었다. 미흡하고 불공평한 조세체계 때문에 민간에서는 조세저항이 발생했고,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도시 등으로 도망하는 바람에 정부는 조세를 징수할 길이 막막해졌다.
또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관영 수공업에 얽매여 있던 17%의 호(戶)가 국가의 통제력으로부터 이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민영 수공업이 관영 수공업의 역량을 흡수함에 따라, 관영 수공업을 통한 민간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처럼 명 제국의 경우에는 민간경제의 발달이 오히려 제국의 와해를 초래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통치권력이 민간부문을 따라잡지 못하다 보니 민간에 대한 통제력이 이완되고, 그러다 보니 세금과 요역을 제대로 징수하지 못하여 결국 통치 시스템이 와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 제국이 윈-윈-윈 하는 것을 지켜본 조선의 양반 지배층들은 명 제국이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임진왜란에도 불구하고 경제·군사 등의 부면에서 여전히 강력한 명 제국의 존재가 그런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해 자신감 있게 쿠데타(인정반정)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지배층이 착각을 했다는 것은 이후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
명 제국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제국의 전성기는 도리어 제국의 와해가 임박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멸망 직전에 다다른 세계 제국이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치 허영심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제적 파산을 어떻게든 숨기려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경제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고, 미국이 최근의 몇몇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다는 사실 등으로부터 ‘미국이 전성기에 도달해 있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미국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전성기의 세계제국은 민간경제의 열기를 감당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비대한 규모에 걸 맞는 돈줄을 유지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포함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은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요절’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때만 해도 한국군에게 월급을 주던 미국이 최근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미국정부의 재정적 역량이 얼마나 왜소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성기에 다다른 미국 민간부문의 역량을 미국 통치권력이 과연 제대로 감당해내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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