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7.11.16 11:23수정 2007.11.16 11:44
가평 처가도 역시, 배추가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겉에서 보기엔 멀쩡해도 속을 벗겨보면 영 부실하다고 장모님이 허탈해 하십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세 집에서, 당장 먹을 만큼의 김치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땅에 묻어두고 겨울 내내 가져다 먹었는데, 올해는 묻을 만큼의 양도 못됩니다.
11월 4일, 일요일. 처가에 세 집이 모여 김장하는 날 여자들은 아이들을 봐주는 게, 제일 크게 도와주는 거라며 제 등을 떠밀었습니다. 땅 파야지 뭔 소리냐며 팔을 걷어 붙여 보았지만 결국은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저는 아이들을 차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평읍을 빠져나와 경춘가도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달려간 곳은 춘천에 있는 신숭겸 장군 묘역입니다. 이번이 겨우 세 번째 방문이지만 앞으로 계속 찾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그런 곳이죠.
단풍으로 곱게 물든 숲길을 걸었습니다. 아이들은 낙엽을 색깔별로 줍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저는 그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빨강, 노랑, 파랑, 분홍…. 조막만한 손으로 가득 주운 낙엽을 머리위로 뿌리며 마냥 신난 아이들을 바라보니 저도 절로 기분이 흐뭇해집니다. 문득, 아이들은 그 자체가 바로 자연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저는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저번 방문에서 가보지 않았던 곳을 찾아서 말이죠. 여름에는 그저 그런 숲이었는데, 가을이 되어 바라보니 정말 아름답습니다. 역시 우리나라는 계절 별로 모든 곳의 느낌이 다릅니다.
한참을 그렇게 가을에 빠져 있다가 장군 묘역을 바라보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곳은 여전히 계절을 잊은 듯 푸르름의 세계입니다.
장군 묘역에는 역시 잔디가 곱게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묘역에서 저 잔디만 바라보면 부여의 능산리 고분이 떠오릅니다. 넓게 경사진 언덕에 쫙 펼쳐진 잔디와 그 위에서 뒹구는 아이들의 모습이 함께 말이죠.
왕의 무덤이건 충신의 무덤이건, 일반 사람의 무덤이건 조용하고 엄숙해야할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탈행위. 하지만 그 당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 얼굴이나 다른 어른들의 얼굴엔, 다들 미소가 있었습니다. 찡그림이 아니라 미소 말이죠.
▲2005년 가을, 부여 ‘능산리 고분군’방상철
▲ 2005년 가을, 부여 ‘능산리 고분군’
ⓒ 방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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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은 잔디가 아주 잘 자랐고 여기에 올 때마다 그 잔디밭에서 뒹구는 아이들의 천진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는데, 다른 데 같으면 관리인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난리를 쳤을 테지만 여기는 그러는 일이 없다. 노는 아이들도, 보는 어른도 모두 평화로운 미소를 띠게 된다. 나는 그것 또한 고맙고 기쁘게 생각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저 책을 출판한 1997년에도 아이들은 그곳에서 뒹굴었고, 이제는 그 아이들의 후배들이 또 뒹굴고 있을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이,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도 그랬고, 두 번째도 그랬으면 지금도 마찬가지로 떠올랐습니다.
항상 저와 함께 있었던 제 아이도 그 생각을 했나봅니다. 저 보고, 저기서 한 번 뒹굴어 보면 안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더군요. 예전에 어느 왕 무덤에서 그러지 않았냐고 말이죠.
저는 일단 말 대신 아이를 데리고 묘역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올라가면서도 많이 망설였지요. 이곳은 신성한 묘역인데,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닌데….
중간 쯤 올라, 아들과 조카와 저, 셋은 함께 밑을 내려다봤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유혹. 이윽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씩 한 번 웃어 보이고, 둘은 뒹굴뒹굴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소박한 웃음소리가 묘역 전역에 울려 퍼집니다.
밑으로 다 내려와 아이에게 이 곳의 주인에게 인사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아이들은 봉분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재밌게 놀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아이들. 아마 신숭겸 장군도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저처럼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2007.11.16 11:23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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