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소연
김종철이 사유하는 아래로부터의 복지는 농민공동체의 복원에서 온다. 그런데 오늘의 자본주의 질서는 농민공동체의 체계적인 붕괴를 오히려 가속시키고 있다. 한미 FTA를 포함한 일련의 국가간 자유무역협정이란 것 역시 결국은 '희소성'이나 '비교우위' 등의 개념에 근거해, 한국의 농민공동체를 파산에 이르게 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의 자본주의는 농민공동체에 근거한 근원적 복지체제를 제거하면서, 그것을 국가가 나서 복원하겠다는 아이러니의 산물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그렇다면 이러한 비전에 대한 체계화된 의제를 생산하는 가령 서구식의 녹색당이라도 건설하는 게 옳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김종철의 생각은 매우 비관적인 것이었다.
"최근 몇몇 젊은 사람들이 녹색적인 가치를 정치세력화할 필요가 있다며 녹색당을 창당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어느 자리에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녹색당이 성공할 가능성은 지금 상황에서 전무한 게 아니냐. 독일 녹생당의 경우를 보자. 독일은 녹색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는 물론, 대중적인 이해도가 우리 사회보다 훨씬 높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이후에는 사실상 녹색당의 존재이유가 없어졌다. 왜 그런가. 사회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은 물론 기존의 계급정당들이 녹색당이 제안하는 가치를 자기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녹색당이 다른 정당들이 하지 못하는 가치를 제안한다면, 그것은 경제성장을 멈추자는 주장이어야 한다. 그게 진정한 녹색당의 정체성인데, 그렇게 하면 표를 잃으니까 독일 녹색당은 그런 노선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은 녹색당을 탈당했고, 녹색당 내에는 이제 현실주의자만 남아있다. 그러다 보니 녹색당이 나토의 코소보 전쟁이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도 묵인하는 식의 녹색적 가치의 왜곡, 타락을 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녹색당의 존립이유는 없는 게 아닌가. 독일도 그런 사정인데, 과연 한국에서 녹색당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독일의 경우 녹색당이 창당될 때는 오늘과 같이 신자유주가 전세계를 위협하던 때가 아니었다. 그때에 비하면 현재의 상황은 대단히 나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 가치만을 이야기하고, 이기적으로 혼자 살아야겠다는 식의 논리에 빠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경제가 발전해서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이 높아졌고, 선진국으로의 진입도 머지않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미래상에 대해 낙관하는 지식인이 많지만, 나는 우리사회가 점점더 회복불능의 파국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인간이란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은 생물학적, 물리학적 존재이다. 지금 일하는 사람이 살 자리와 터전이 없어지고 있다. 농경지의 파괴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고, 기후악화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한 사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게 교육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교육은 어떤가. 과감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생각 있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있다. 이건 교육이 아니다. 돈 있는 사람은 조기유학이나 영어교육에 미쳐 있다. 공교육은 무너졌고 사교육은 번성하고 있다. 교육의 총체적인 난맥상을 보라. 우리가 공통된 삶의 조건 속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문명을 공유하며 살아간다는 공공성에 대한 인식은 오늘의 교육을 통해서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우리사회를 전혀 낙관할 수 없다."요컨대 오늘날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는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김종철의 근본적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녹색당조차 제도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내놓고 제기하기 힘들다. 대의제 민주정치 구조 아래서, 녹색당이 제도정당으로서의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론'에 편승해야 할 텐데, 그랬을 때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당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케 할 것이라는 비관주의다. 이렇게 본다면 김종철의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는 매우 뿌리 깊은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종철은 비관적 상황에 대한 어설픈 희망보다는, 비관적 상황 그 자체를 냉철하게 사유하는 시각이야말로 오늘의 시민들에게 오히려 더 필요한 가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반문은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서경식 교수 역시 동일하게 제기한 바 있다. 그는 이른바 민주화의 시기에 자신의 두 형인 서승과 서준식 형제가 한국의 감옥에 수감 중일 때, 이탈리아계 유태인인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이탈리아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전쟁 후 이탈리아에 돌아와 <이것인 인간인가>라는 작품 등을 통해서, 우리가 통념적인 인간에게서 찾고 있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실상에 있어서는 얼마나 허구적이고 절망적인 가치인가를 되물었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으로서의 문학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 자살했다. 서경식 교수는 이 증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절망에 전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은 정작 뿌리 깊게 절망해야 할 때 그 절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낙관주의보다는 정직하고 근원적인 절망이 때로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절망을 회피하려는 의식이 강한 것 같다.
어쩌면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망보다, 절망을 보다 투명하게 투시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김종철의 절망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근본적 절망과 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절망과 비관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를 틀 지우고 있는 반인간주의와 반생명주의의 무서운 발전주의를 상대화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 최근 문단에서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견해도 물어보았다. 일본의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논문에서 문학계를 떠난 김종철을 거론하면서, 한국에서 문학의 근대적인 비판기능이 상실되고 있음을 논한 바 있다. 이러한 고진의 논의가 한국 문단에 가한 방응은 격렬했다. 많은 수의 젊은 비평가들이 고진의 진단을 갑론을박했고, 그 와중에 백낙청과 최원식, 황석영과 같은 비평가와 작가들은 고진의 한국문학에 대한 평가가 잘못된 가정에 입각한 오류하면서 비판했다.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 때문에, 불가피하게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김종철의 한국문학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근대문학의 종언 = 근대지식인의 종언 "나는 아무 당사자도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이 자신의 글에서 대구에서 나와 잠깐 만났던 일을 자신의 논문에서 언급한 탓에 구설수에 올랐던 것 같다. 내가 문학공부를 손에서 놓은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논의를 할 만한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밝히고 싶다. 적어도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견해의 취지는 존중해야 한다. 나 역시 가라타니의 글을 읽어보았는데, 그는 현재의 한국문학상황을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표현했다. 그 글을 보면 그것이 단순히 문학계에 한정된 주장이 아니고 근대적인 지식인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시점에서의 일본을 포함한 세계의 지적, 정신적 상황을 진단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 글 속에는 가라타니라는 지식인의 위기상황에 대한 고민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국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입론이 틀렸다, 지금 한국에서 근대문학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건방지다, 지금처럼 한국문학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때가 어디있는가의 주장하는 것은 가라타니의 취지와 매우 어긋난 견해다.
물론 한국문학이 양적으로 활발하고,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20만 권 이상 팔릴 정도로 한국문학이 융성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라타니의 주장은 범주가 다른 이야기다. 가라타니의 고민은 100여년 이상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생각해왔던 사유의 정통적인 방식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 역시 고진의 강연록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정돈된 글은 아니고, 가라타니의 주장 내부에 일정한 혼란이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취지는 이해하겠더라.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가 몰락함으로써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주장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근대문학이 형성되고 전개된 것이 명치유신 이래 자본주의 제도가 들어오면서 풍미한 '입신출세주의'의 영향이며, 이에 대한 비판적 활동으로서 일본 근대문학이 자리잡았다는 주장일 것이다. 요컨대 가라타니의 참 뜻은 체제에 대한 비판적 활동으로서의 문학이 일본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크게 약화되거나 붕괴되었다는 취지로 나는 이해한다.그것을 우리상황으로 옮겨와 보면 어떤가. 가라타니의 진단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어떤 작가의 작품이 잘 팔린다는 것은 가라타니의 주장과는 별개의 문제다. 가령 해리포터가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팔리는 것은 그게 문학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분위기에 편승해서 팔리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을 근대 지식인의 종언이라는 식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읽으니 오히려 더 실감나더라.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이 상당히 약화된 것 아니냐. 반대로 오히려 체제의 논리를 공급해주는 지식인, 싱크탱크로서의 능력은 신장되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묻고, 극복해야 할 부분에 자신의 지적, 정신적 에너지를 쏟는 지식인은 확실히 드물어진 것이 사실이다. 지금 그걸 지적인 과제로 삼는 분위기가 아니다."김종철의 견해를 듣다보니,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동의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오늘날의 작가들의 태도다. 오늘의 젊은 작가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스스로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많은 수의 젊은 작가들은 작가라는 직능 안에서, 다만 쓴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부심만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들에게 당신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나는 작가라고 말한다. 작가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식의 순환논법이 그것이다.
"사회 속의 여러 직업군 중의 하나를 작가로 규정하는 걸까. 그러나 작가는 겸손하면 안 된다. 작가는 자기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작업에 공동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책임감이 작가에게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나는 무엇 때문에 작가들이 문학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인간정신이 왜소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도 경제성장을 겪은 사회의 공업화와 자본주의가 무르 익어가면서, 물질주의의 쾌락을 한번 맛본 사회 일수록 작가들의 비판력이나 비판적 사고능력이 약해지는 것 같다. 몸이 편안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생각들도 작아지고, 왜소해지는 것 같다."김종철의 작가에 대한 정체성 규정은 결국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닮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그의 평론집인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에서 그가 했던 발언을 상기했다.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어쩌면 르포작가나 저널리스트들이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우리 문학을 보면, 결국 땅에서 멀어지니까 야성이랄까 하는 부분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문학은 일본 근대문학보다 야성적이었다. 일본의 근대문학은 대개 일류대학 출신이 주도했다. 나쓰메 소세끼, 오에 겐자브로를 보라. 일본의 작가들은 거의 대개가 동경대 아니면 일류 명문대학 출신이다. 그러나 한국은 안 그렇다. 사실 작가에게 학력이란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이효석 같은 경우, 경성제대를 나왔지만 메이저 작가는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민중 속에서 나온 작가가 주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근대문학의 족적은 민중생활과의 밀착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을 한국적으로 보면, 그러한 민중적인 관련성, 민중생활과의 밀착이 상실되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결국 야성이다. 들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과거 우리문학의 핵심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없다. 문학뿐만 아니라 지식인 일반의 작업을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들사람의 목소리가 없다. 근대문학이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체제비판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이때의 체제란 그때 그때의 정권이나 지배세력을 넘어,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근대란 결국 사람의 정신을 순치시키고 길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날카롭게 저항하고 야성의 사고를 이야기해 공감하게 만들고 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학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런 역할이 90년대 이후부터 상당히 약화되었다. 여기서 민족문학이나 민중문학이란 개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들사람의 목소리가 약화되면서 문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을 실망시킨 것은 아닌가.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지식인과 문학인의 정신적 왜소화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실제로 '들사람들'의 목소리가 한국문학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가들조차 쓴다는 행위를 '체제비판'과 관련시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과격하게 상실해가고 있다. 오늘의 한국문학은 '동시대성'과는 무관한 사소주의에 빠져있음은 여러 비평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비판이다. 문학이 현실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다만 웅얼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은 작가들 자신에게서도 동시에 발성되고 있다.
헛된 희망보다 절망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정론지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