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참 좋다. 어제는 7시간 정도를 걸었다. 이 때문인지 종아리가 좀 뻣뻣하긴 하지만 컨디션은 좋다. 오늘은 10월 25일. 나야풀에서 트레킹 6일째.
아침 공기가 꽤 차다. 세면장의 차가운 물로는 양치질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전날 밤 뜨거운 물을 채워 침낭 안에 넣어둔 내 물통을 열었다. 아직 미지근하다. 이걸로 깔끔하게 양치를 하고, 세수는 용감하게 찬물로…….
잘 그을린 얼굴, 삐죽삐죽 수염... 반 네팔인이 되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오전 7시. 내 옆방에서 묵은 박가람, 황현선양이 밖으로 나온다.
“잘 잤어요? 발은 좀 어때요.”
“아~ 예, 아저씨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한밤중에는 아저씨가 준 찜질팩이 너무 뜨거워서 수건에 감고 발목을 덮었어요. 고맙습니다.”
인사 한 번 요란하고, 깍듯하다. 근데, 아저씨라……. 아, 내가 벌써 아저씨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었구나. 벽에 걸린 거울을 봤다. 일주일 동안 깎지 않은 수염이 볼 품 없이 자라 있고, 여기까지 오면서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거의 네팔 현지인 수준이다.
‘선크림을 꽤 부지런히 바른 것 같은데…….’
전날 미리 주문해 둔 삶은 계란과 마늘스프, 그리고 생강차가 시간 맞춰 준비돼 있다. 마늘스프는 고소 예방에 좋다고 해서 전날 저녁과 오늘 아침 거푸 먹고 있다. 원래 마늘을 좋아하는 편인지라 여기의 마늘스프 역시 별 거부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맛이 좋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작은 튜브형 고추장 세 개를 가져왔었다.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했던 거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아직 한 번도 고추장 튜브를 열지 않았다. 그만큼 네팔 음식이 나에게 무난했다.
“먼, 프리티는?”
“응, 먼저 갔어. ABC에.”
“아, 그렇구나. 그럼 우리도 출발해 볼까?”
어제 나는 먼에게 아침 일찍 프리티를 먼저 올려 보내서 ABC 롯지의 방을 잡아두게 하라고 부탁했었다. 나는 그걸 위해 미리 내 배낭에서 당장 필요 없고 무거운 짐 몇 가지를 덜어냈었다. 이렇게 덜어낸 짐은 여기 데우랄리의 롯지에 맡겨둔다. 나름대로 프리티를 위한배려였다. 가지고 간 3권의 책 중에서 달라이 라마의 <용서>만 챙겼다.
박가람양과 황현선양의 출발 준비가 약간 늦다. 내가 먼저 출발한다.
“우리 먼저 올라갈게요. 천천히 와요.”
“예, ABC에서 뵈요, 아저씨.”
아저씨가 맞긴 한데……, 어째 ‘아저씨’ 소리가 날아와 귀에 박힐 때마다 가슴에 큰 돌이 쿵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다.
‘얘들아 난 아직은 오빠이고 싶은 삼십대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트레킹은 천천히 걸으면서 현지 사람과 교감하는 것
쌀쌀하다. 바람이 차다. 방한용 내피에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운행용 방한 장갑도 꼈다.
‘천천히, 천천히…….’
속으로 ABC 트레킹의 화두(?)를 되뇌어 본다. 원래 트레킹은 등반과 다르다. 특히나 이곳 네팔의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정말 천천히 걸으면서 이곳 주민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마을을 느끼고, 사람을 느끼는 게 그 본질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꽤 애를 써왔다. 나야풀에서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 가이드 먼바들에게 내가 처음 했던 말도 이랬다.
“먼바들, 난 아주 천천히 걸을 거야. 가능한 한 천천히 걸으면서 안나푸르나까지 가는 동안 많은 걸 보고 싶어.”
그리고, 여기까지 오르면서 ‘나마스떼’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 또한 ‘천천히’였다. 그래서 이제는 먼바들 조차 ‘스로우리, 스로우리(Slowly Slowly)’ 대신 ‘천천히, 천천히’라고 말을 하게 됐다.
운무가 내려앉았는지, 안개가 몰려왔는지 눈앞이 온통 희뿌옇다. 길은 어렵지 않다. 오르막이라기보다 차라리 평지에 가깝다. 약 2시간 정도 걷자 돌계단이 보이고, 그 끝이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3700)의 롯지까지 이어진다.
“먼, 여기서 차 한 잔 마시자.”
블랙티 두 잔을 주문하고, 롯지 마당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았다. 앞에는 푸근한 느낌의 안나푸르나 사우스가, 롯지 뒤편 지붕 너머에는 마차푸차레의 웅장함이 우뚝하다. 여기서부터는 맨눈으로 설산을 바라볼 수가 없다. 너무 눈이 부시다.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선글라스를 써야 한다.
다시 길을 나선다. 울퉁불퉁한 돌이 잔뜩 깔린 길이 나오다가 일찍 삭아 누워 있는 갈색 풀밭으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올라간다. 가다가 중간에 두어 번 길가에 나가서 오줌도 눈다.
이렇게 오줌을 눌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이뇨작용이 제대로 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줌이 잘 나온다는 건 고소를 맞지 않을 확률이 그만큼 높다. 아직 내 컨디션은 정상이다. 어지럼증도 두통도 없다.
우리 앞뒤로 많은 외국 트레커들도 보인다. 둘, 혹은 서너 명이 무리를 지어 오르고 있다. 혼자 여기 온 사람은 나뿐이다. 이 들 중 독일에서 온 한 커플은 신혼여행으로 ABC 트레킹을 택했다며 환히 웃는다.
4시간 반 걸린 길을 프리티는 1시간 반만에 올랐다
나는 이 독일 커플과 거의 동시에 ABC에 닿았다. 그리고 우리는 ABC 푯말 앞에서 서로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저 멀리 롯지 마당에서 프리티가 우릴 보고 웃고 있다. 이때가 오후 12시 반. 중간에 MBC에서 차 마신 시간을 빼면 데우랄리에서 여기까지 4시간이 걸렸다.
“프리티, 나마스떼~. 그리고 고마워.”
우리보다 일찌감치 올라온 프리티는 롯지 부엌에서 가장 가까운 1번 방의 열쇠를 나에게 건네준다.
“언제 올라왔어?”
“9시 반쯤 도착했대.”
먼이 말했다. 프리티는 내가 데우랄리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길을 나섰다. 그렇다면 그는 1시간 반만에 여기 ABC까지 올랐다는 말이 된다. 새삼 프리티가 대단해 보인다.
점심으로 야채롤빵과 마늘스프, 생강차를 먹고 롯지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본다. 공기는 차고, 안개는 자욱하다. 롯지 뒤편 저 멀리 불교의 기도 깃발(룽다)이 어지럽게 펄럭이는 언덕이 있다. 그 꼭대기에 수십 개의 돌탑이 쌓여 있다.
천천히 거기까지 올라간 나는 근처에 있는 작은 돌을 주워 가까운 돌탑에 가만히 내려놓아 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잘 왔다. 여기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그동안 얼마나 그리던 나의 로망이었나. 여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지만 여전히 순결한 땅이다. 수만 년 쌓이고 쌓인 저 눈의 산을 허리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여기서 미국 아가씨 엘런을 만나다
다시 언덕을 내려와 롯지로 돌아가는 데 저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구게임을 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배구선수들은 바로 가이드와 포터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산소가 부족한 여기서 저들은 저렇게 뛰어 다닌다. 내 가이드 먼도 있다. 먼도 나를 보더니 멋쩍게 웃으며 한 마디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야. 배구.”
“아, 그래? 네 편이 이기고 있니?”
“이제 막 시작했어? 같이 할래?”
헉~! 나보고 죽으라고?
“아니, 난 추워서 들어가야겠어.”
나는 얼른 도망치듯 롯지로 돌아간다. 박가람 양과 황현선 양이 막 도착해 있다. 저녁식사 시간, 나는 이 두 아가씨와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이들은 뜨거운 물 한 통과 맨 밥을 주문한다.
“우린 가지고 온 라면 먹을 거예요. 여기 오면서 만난 한국 트레킹 팀이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라면을 주셨거든요. 이때까지 아껴뒀어요.”
“야, 맛있겠네. 그래도 그것만 먹는 건 좀 그런데…….”
나는 따로 애플파이를 주문해 이 두 아가씨들에게 건넸다. 그런데……. 어라……? 롯지 주인이 김치를 내놓는다. 자신을 J. B. Gurung이라고 밝힌 롯지 주인은 어제 한국인 트레커 한 팀이 왔었다며, 그들이 약간의 김치를 두고 가면서 다른 한국인 트레커가 오면 꺼내 주라고 말했단다. 흐흐~ 한민족의 끈끈한 정이 여기 안나푸르나 산 밑에서도 뜨겁구나.
저녁 식사 후 롯지 마당을 지나 뒤편 언덕 쪽으로 산책 겸 걸어본다. 저쪽에 나처럼 산책 나온 듯 한 서양 아가씨 한 명이 서 있다. 그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안녕, 어디서 왔니?”
“한국. 넌?”
“미국. 여기가 처음이니?”
“엉. 근데, 안개가 너무 짙어서 산이 안 보이네. 아쉬워.”
이 미국인 아가씨의 이름은 엘리나. 그는 나에게 그냥 ‘엘런’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누구하고나 쉽게 친해지는 묘한 매력을 가진 아가씨다. 친구와 둘이서 ABC 트레킹에 나섰고, 내일 여기에서 내려간다고 한다.
나도 내일 여기서 내려간다.
<9편에서 계속>
*** 여행 메모 ***
1) 내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했던 때는 10월 중순. 이 때는 ABC 트레킹의 최성수기에 속한다. 거의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ABC에서 하룻밤 묵기를 원하기 때문에 운이 없으면 방이 없어서 올라가자마자 바로 내려와야 한다. 따라서 만약 데우랄리에서 출발한다면 좀 일찍 포터를 올려보내서 미리 방을 잡아두도록 한다.
2) 고소 예방에는 마늘 스프가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나도 데우랄리부터 매 끼니 마다 마늘스프를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혀 고소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고소 예방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천천히 오르는 거라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천천히란, 손주 손잡고 마실가는 할머니의 걸음 정도라 생각하면 된다. 너무 느리지 않느냐고? 트레킹이란 그런 것이다.
3) ABC 캠프는 생각보다 많이 춥다. 샤워는 꿈도 구지 못할 뿐 아니라 세수조차 힘들다. 밤에 자기 전 1리터들이 물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워서 침낭 발밑에 넣고 자면 좋다. 따뜻하기도 하고, 뜨거운 물통으로 종아리 맛사지를 해도 좋다.
2007.12.06 13:13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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