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의 의미는 참 어렵다. 누구나 태어나서 살고 있고, 역사에 짙게 기록된 철학자들과 그리고 종교가 나름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생의 의미는 딱히 이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21세기는 의미란 삶의 주요 과제를 장롱 깊숙이 감추는 것 같다. 21세기의 정신적 대안으로 조명되고 있는 동양의 한복판 한국에서 정신의 가치는 이제 그만 쌓인 먼지가 녹록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국악을 말하면서 절대로 빠트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지금이야 그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국악의 양대 기류인 정악과 민속악은 배우는 학교가 명확하게 분간되었다. 정악은 국립국악중고등학교에서, 민속악은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아래 예고)에서 각각 배울 수 있었다. 나라에서 세운 학교와 달리 지금까지도 사립인 예고의 경우는 개인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예고를 설립하는데 향사 박귀희, 만정 김소희 두 지난 명인은 절대적인 공헌을 했고, 특히 박귀희 선생의 꺾이지 않은 의지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예고는 과연 존재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향사 선생이 세상을 등진 후로도 시간은 묵묵히 제 갈 길 갔고, 그렇게 10년이 지난 2003년에서야 비로서 향사 박귀희 선생의 음악적, 지사적 의미를 내건 음악회가 열렸다.
향사 선생의 호를 딴 <향음제>가 그것인데, 가야금병창의 빼어난 명인이었던 선생의 유지를 받든 가야금병창 명인 강정숙과 제자들이 한 해 전 결성한 가야금병창보존회가 주축이 되었다. 그 후 매년, 그리고 유일하게 향사 박귀희 선생을 기리는 음악회를 열고 있다. 올해는 12월 5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제자들은 여민 옷깃으로 관객을 맞았다.
현재 명인세대 뒤를 이을 분명한 차세대 가야금명인으로 자리를 굳힌 용인대 이지영 교수가 서공철류 가야금 산조를 타면서 다섯 번째 향음제는 막이 올랐다. 가야금병창보존회원 중 올해 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서영례, 강미선의 병창 무대, 노래를 살짝 감추고 한양대 김성아 교수와 가야금 이중주를 선보인 박현숙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영재 교수 작곡의 ‘황토길’을 25현 개량가야금으로 연주했다.
보는 이마다 조금 달리 평가할 수 있겠으나, 대체로 이날 최고의 순서는 강길려 외 35명이 무대에 빼곡이 앉아 부른 가야금병창이었다. 이들이 연주한 ‘가야금의 노래’와 ‘눈사람’ 두 곡은 오늘날 가야금병창의 대명사인 강정숙 명창이 요즘 잘 불리지 않는 민요를 가야금에 올려 새롭게 만든 것이다.
요즘에야 작곡이 당연시 되는 시대이지만 강정숙 병창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곡들은 작곡보다는 과거 명창들이 자신의 더늠(자신만의 소리 창조)을 넣듯이 만든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자칫 작곡에 전적으로 가려질 뻔한 국악 창조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강정숙 명창이 새로이 내놓은 민요를 더늠민요라 부르기로 했다(민요는 통속민요. 신민요, 토속민요 등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 명칭이 영 마뜩찮다).
회원들 중 가장 젊은 8명은 요즘 추세에 맞혀 개량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크로스오버도 선보여 가야금병창보존회도 시류에 완전히 등돌리고 있지 않음을 보였다. 수많은 국악단체 중에서 가장 고집이 센 가야금병창보존회도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경향에 대해서 전적으로 돌아서진 못해도 조금은 허용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또한 이예랑, 이사랑 쌍둥이 자매는 트로트 조의 노래를 가야금 연주와 곁들였는데, 국악무대에서 트로트가 나오자 객석의 공기가 일순간에 달라졌다. 일상에서 익숙한 트로트 노래를 들어 흥겨웟다는 사람도 있었고, 차분한 분위기에 격이 맞지 않았다는 의견도 분분했다. 가야금 트로트는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른 듯 싶었다.
대중가수들의 콘서트에 게스트가 존재하듯이, 향음제에도 오정숙 명창, 정재만 명인, 김영임 명창 등이 우정 출연하였다. 특히나 고령의 오정숙 명창은 멀리 익산서 올라온 여독도 있거니와 건강상의 이유로 단가 사철가 한 곡만 하려고 했으나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못 이겨 춘향가 중 한 대목을 예정에 없이 더 불렀다. 오 명창을 흔히 우리시대 월매라고 부르는데, 이 날 부른 대목 또한 어사또 춘향모 만나는 대목으로 그 별명이 딱 맞아떨어짐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국립국악원 예악당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2시간 10분의 결코 짧지 않은 공연 시간에도 시종 진지하고 혹은 흥겨워 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오정숙 명창을 간만에 대하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었고, 가야금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감상하면서 새삼 가야금이 우리 민족음악에 얼마나 중요한 악기인지도 알았을 것 같았다.
또한 가야금병창보존회만이 아니라 올해 국립국악원 민속단 예술감독까지 맡아 몸이 둘이라도 모자를 형편이라 올해 무대에는 오르지 못한 강정숙 명창이 35인 병창 때 잠시 무대에 등장해 향음제의 의미를 설명했을 때에 관객들은 숙연한 분위기로 가라 앉았다.
어떤 영화에서 한 배우는 ‘기억이 없는 것은 돈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이라는 대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현대 우리는 기억이 쫓아올 만큼의 적정한 속도로 살고 있을지 의문스럽다. 기억과 동행할 수 있는 걸음의 속도는 향음제같은 음악회에서 비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향사 박귀희 선생, 만정 김소희 선생 등 전대의 명인들과 직접적인 추억을 만들지는 못했으나 향음제에 와서는 마치 나의 스승인 듯 아련한 심정에 젖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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