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

미혼모, 입양엄마, 실향민 어머니까지... 애틋하고 가슴저린 어머니들의 이야기

등록 2007.12.10 15:23수정 2007.12.10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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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글 송지윤] 미혼모, 입양 엄마, 할머니 엄마, 이주 여성, 실향민 어머니, 수감자 어머니, 임종을 앞둔 치매노인….


<인권>이 만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애틋하면서도 가슴 저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상처이자 매정한 힘겨운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일 듯하다.

[미혼모] "애 혼자 낳아서 기른다며?"

김영미(가명) 씨는 3년 전 엄마가 됐다. 친정식구들은 임신 8개월이 돼서야 김씨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머리채를 잡고 낙태를 종용하며 아이를 포기하도록 압박했다. 그런 친정식구들 때문에 아이를 입양기관에 보냈다가 1주일 만에 되찾아오는 웃지 못할 추억도 남겼다.

"아이 울음소리만 들려도 우리 현수(가명) 같았어요. 아이를 쓰레기처럼 버리고 왔다는 생각에 미치는 것 같았죠. 아이 없인 내가 못살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다시 데려왔어요."

그런데 입양기관에서 아이를 되찾아 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입양기관에서 '업무'에 차질이 생긴다며 난색을 표한 것이다. 김씨는 필사적으로 아이에게 매달렸는데, 입양기관 관계자는 일상적인 사무를 처리하는 모습이어서 기가 막혔다고 했다.


그는 입양기관에서 "아이를 사생아로 키우고 싶으세요?"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 때 처음으로 '사생아'란 단어를 알았다며 앞으로 있을 고행의 길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3일 내내 베개로 입을 막고 울고 나서야 시련에 대비할 준비가 되더란다.

미용사로 일하는 김씨는 그나마 경제적 어려움이 덜한 편이다. 많은 미혼모가 생계비와 양육비를 걱정하는 것에 비하면 한시름 덜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회의 편견과 곱지 못한 시선에 더 예민해진다고 말했다.


"3일만에 직장을 그만둔 적이 있어요. 제가 미혼모인 사실을 안 새까만 후배들이 '애 혼자 낳아서 기른다며?'하고 비웃는 거예요. 그건 참을 수 있었는데 사생아 어쩌고 하며 아이까지 들먹이는데 참을 수가 없었어요. 또 한번은 회식을 하는데 이혼한 동료가 저더러 '미혼모라길래 되게 문제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도 혼자 애 키우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이혼녀라서 다르다고 말하더군요."

김씨는 열심히 살아도 그대로 봐주지 않고 미혼모로만 보는 세상에 지쳐 이민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외국생활이 쉽진 않겠지만 아이한테까지 미혼모의 상처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호주제가 폐지돼 아이들이 엄마의 성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채 아이를 키우는 여성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현상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오죽했으면 미혼모의 자녀로 크는 게 싫어 이민 갈 생각까지 했을까. 세상 사람들의 '색다른' 눈길에 상처를 입어 술에 의지한 적도 있다는 김씨의 고백에서, 이 땅의 싱글맘들이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엿보게 된다.

김씨는 요즘 친정아버지께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쓴다고 했다. 처음엔 불태우시다가 지금은 머리맡에 모아놓으신다는 아버지 소식에 그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저는 현수를 위해, 또 저를 위해 두 배 열심히 살 거예요. 능력이 있어야 미혼모임이 밝혀져도 무시하지 못하거든요. 비웃지 못하도록 매사에 최고가 될 거예요."

세상을 향한 어느 싱글맘의 비장한 다짐이다.

[입양엄마] "그런 사람들이 날 버렸겠어?"

"너무 이쁘죠. 말도 못해요."

아들 얘기를 시작하자 송문선(가명)씨 얼굴에 함박꽃이 핀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준영이, 호영이는 송씨가 가슴으로 낳았기에 더욱 소중한 자식이다. 송씨는 두 딸이 있는데도 1995년 준영이, 1997년 호영이를 입양했다. 그는 입양원에서 봉사할 때만 해도 직접 입양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운명처럼 준영이가 송씨의 품에 안겼다.

"봉사자들이 손도 못 대겠다고 할 만큼 아주 유난스럽게 우는 애가 들어온 거예요. 애가 3개월간 생모랑 살다 왔더라고요. 엄마 품을 아니까 저렇게 우는 거겠지 싶어 자꾸 마음이 갔어요."

송씨의 오랜 자원봉사 활동을 지켜본 가족들은 기꺼이 찬성했다. 그러나 친척들을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12년이 지났는데도 눈치가 보여 가족모임엔 잘 참석하지 않을 정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어떻게 두 아이나 입양할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니, 준영이가 외롭게 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단다. 또래 형제와 의지하길 바랐다는 엄마의 마음이다. 그런데 둘째 호영이를 입양하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얌전한 호영이가 세 살이 지나도록 말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 정신지체 3급 판정을 해주더란다.

"우울증이 왔었어요. 아이를 잘 기를 수 있을까 고민도 됐죠. 애가 조용하니까 입양원에서 방치되고 엄마 뱃속에서도 편치 못했을 걸 생각하니 가슴도 아프고…. 그런데 장애를 알고 나서 더 신경을 쓰니까 애가 빠르게 좋아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희망이 생기고 우울증도 이겨냈어요."

그렇게 엄마의 상처가 아물 무렵, 이번에는 준영이 때문에 고민이 생겼다. 동생이 말도 느리고 어눌하니까 다시 갖다주고 똑똑한 동생으로 데려 오라라며 떼를 쓴 것이다. 그 무렵 엄마는 언젠가 해줄 얘기였고 동생에 대한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8살 준영이에게 처음으로 입양 사실을 알려줬다.

준영이의 반응은 예상보다 극렬했다. 엄마의 맹장수술 자국을 보고 "날 낳은 흔적이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며 몸부림쳤다. 송씨는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며 괜히 말한 게 아닌가 후회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그 후 준영이는 자신을 낳은 부모에 대한 질문을 자주했단다. 송씨가 친절하고 의리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해주면, 준영이는 "그런 사람들이 날 버렸겠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준영이의 상처는 송씨의 오랜 노력 후에야 조금씩 가라앉았다고 했다.

송씨는 입양아동을 키우는 처지에서 현실적인 고충도 털어놓았다. 현재 입양 수속에만 지원되는 국가 보조와 관련, 보다 실질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례로 호영이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으면, 입양아의 경우 의료보호 1종이기 때문에 약은 무료로 받을 수 있단다. 그러나 아이에게 정신과 약을 먹이는 게 꺼림칙해 상담 치료 프로그램을 받게 하는데, 그건 지원대상이 아니라 비싼 비용을 치른다는 것이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이를 수출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한국.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입양 비율은 낮고 어렵게 새 부모를 만난 아이들은 상처를 입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상처가 우리 내부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더 마음이 쓰리지 않을 수 없다.

[이주여성] "베트남 엄마라 미안한 마음이에요"

7쌍 중 한 쌍은 국제결혼을 하는 대한민국. 그런데도 이주민, 특히 이주여성들이 부대끼는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다. 이주여성들의 모성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빛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부터 달라져야 한다.

임왕복옥씨는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노란 가방을 옆으로 둘러메고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 딱 동네 아줌마다. 동글동글한 생김새며 한국어까지 유창해 순간 베트남 신부란 생각을 못했다. 한국말 잘하신다 하니 무시당하기 싫어 혼자 열심히 공부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그가 이주여성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베트남 아가씨 폭곡양이 한국에 와서 임왕복옥씨가 된 지 12년째다. 근로자 현지 파견으로 베트남에 온 남편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보다 타향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문화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고…. 특히 말을 모르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집 밖에 나가기만 해도 무서웠으니까요."

그녀는 그럴수록 더욱 세상 속에 들어가 부딪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덕분에 임씨는 이제 수준급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임왕복옥 씨는 한국어 발음이 매끄럽지 않아 아이들 교육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3년 전, 1학년이 된 딸과 집에서 받아쓰기를 하는데 "발음이 그게 뭐냐"며 엄마를 당황스럽게 하더란다. 엄마는 '아차' 싶었다고 했다. 말문도 늦게 터지고 유치원 다닐 때는 언어능력이 떨어진다는 소리까지 들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임씨는 그 길로 학교로 찾아가, 선생님께 "보다시피 내가 외국인이라 공부를 챙겨주질 못한다"고 알려주고, 선생님께 세심한 배려를 거듭 부탁드렸단다.

"애한테 항상 미안하죠. 엄마가 부족해서 뭘 물어봐도 잘 가르쳐주지 못해요. 미안한 마음  뿐이에요."

임씨는 딸 걱정을 많이 했다. "한국 사람들은 결혼할 때 사랑보다 조건을 중요하게 따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라 문제가 돼, 딸이 상처 받지 않을까 걱정돼요."

그는 엄마가 기죽어 지내면 아이까지 위축될까 걱정스러워 딸 앞에서는 항상 자신감을 보이려 애쓴다고 했다. 그런 덕분인지 딸이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복지관에서 통역까지 하는 엄마의 모습이 딸의 눈에도 뿌듯하게 비쳤을 것이다.

임씨는 좋은 엄마다. 그러나 임씨가 되고 싶은 것은 그보다는 아이에게 '평범한' 엄마인 듯하다. 임씨가 평범한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몫이 아닐까. 임왕복옥씨로도 폭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스스로 좋은 엄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더욱 좋겠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이 나라에 와 준 베트남 엄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도리일 것이다.

[조손가정] "에미가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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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이용복(가명) 할머니는 4명의 손녀와 함께 산다. 9년 전 아들 내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자 갈 곳이 없어진 아이들을 데려와 키웠다.

"사람들이 자꾸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어. 데려갈 사람 있다고 보내라 하더라고. 그게 말이 되나. 할미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당치도 않지."

할머니는 아이들을 거두는 걸 당연한 일로 여겼다. 할머닌 아들이 남긴 빚을 갚고 살림을 꾸리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배 봉지를 싸고 고구마를 캐고 고구마 줄기도 다듬어 시장에 내다 팔며 손녀들을 뒷바라지했다. 올해 75세인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일을 더 해야 하는데 자꾸 다리가 아프다며 속상한 마음을 내비친다. 그래도 손녀들이 의지가 된다며 엷은 미소를 보였다.

"내가 고구마를 캐면 막내가 주우러 와. 일하고 오면 이것저것 맹글고 먹으라 하고. '맛있어?'하면서 입에 넣어주고. 그러면 이쁘지. 그런 게 사는 재미 아니겄어."

막내는 유난히 할머니를 잘 따른다고 했다. 세 살 때부터 키우기 시작했으니까 엄마나 다름없는 할머니일 것이다. 잠잘 때 하도 들러붙어 "언니한테 가서 자라"고 윽박질러도 꼭 할머니 곁에서 잔다는 막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녀들이지만 엄하게 기르려고 애쓴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둘째가 이만한 귀고리를 하고 왔길래 당장 빼라고 혼을 냈지. 학생이 공부해야지 그런 멋내기를 하면 안 되거든. 내가 항상 애미 애비 없는 자식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얼매나 가슴을 졸이는지 몰러. 그래서 만날 잔소리 허지. 말 안들을 땐 욕도 바가지로 쏟아놔. 그래도 그게 어디 미워서 그라나. 다 지들 잘되라고 그라지."

할머닌 요즘 맏이의 대학입학금 때문에 잠이 오질 않는다고 했다. 애한테는 벌써 대학에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단다. 보내준다고 하고 못 보내면 실망할까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남들만큼 가르치고 싶은 게 할머니 속마음이다. 지금껏 강한 모습만 보이던 할머니가 등록금 얘기가 나오자 눈물을 훔쳤다.

"애들이 뭔가 하고 싶어 하는데 못해줄 때가 제일 속상혀. 지 애미가 있었으면 해줬을라나 싶기도 허고. 기 안 죽일라고 아등바등 하는데 참 힘들어."

할머니는 애들이 '안됐다'고 했다. 그래도 어둡지 않게 자라준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고 했다.

"큰애 시집가는 것만 보고 죽어도 좋겄어. 지 밥벌이하고 잘 사는 모습 보면 됐지. 할머니가 고생해서 내가 이만큼 산다고 생각해준다면 여한 없고…."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라지만 경제성장의 그늘에는 아직도 생계를 걱정하는 빈곤가정이 존재한다. 부모가 없는 조손가정도 그렇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만 맡겨두기엔 그들이 처해 있는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다.

이용복(가명) 할머니와 네 손녀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밝게 살고 있지만 모든 조손 가정이 이렇지는 않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나쁠 건 없지만 조손 가정은 대개 빈곤의 굴레에 갇혀 있다. 경제 능력이 떨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로선 손주들을 키우는 게 너무나 힘에 부친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2005년 기준으로 조손 가정은 6만 가구 정도. 양극화의 그늘을 드러내는 이 수치는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사회적 관심이나 지원은 그 증가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다. 조손 가정의 절반은 수입이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친다. 연락조차 안 되는 아이들 부모가 부양자로 등록돼 있으면 얼마 안 되는 의료비나 교육혜택도 받기 어렵다. 할머니들이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빈 자리를 메울 수 있도록 돕고 살펴야 할 것이다.

[실향민 어머니] "보배가 보는 달, 나도 보겄소"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는 어머니들도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일상적인 일들인데 전쟁을 겪으며 생이별을 한 사람들에겐 일생일대의 숙원이 된다. 수십 년을 기다려 겨우 얼굴 몇 번 보고 "소원 풀었다"고 말하는 이산가족들이 그런 경우다.

"나보담 주름이 많아서 못 알아봤제…."

안금철(80) 할머닌 사진 속의 또 다른 할머니를 가리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진 속 얼굴은 지난 10월, 제16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57년만에 만난 딸 이보배씨다. 할머니의 고향은 함경북도 길주다. 고향에서 결혼을 했지만 먹고 살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할머닌 성진으로 내려와 언니네 장사를 도왔고 남편은 남으로 내려가 날품을 팔았다. 그러는 동안 네 살배기 딸을 친정엄마에게 맡겼다. 그러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할머니는 난리통에 사람들에게 떠밀려 남으로 내려왔다. 딸 보배를 챙기러 다시 북으로 가려 했을 땐 순사들이 총으로 통행을 막는 살벌한 판국이었다.

"사방이 하도 무서우니께 혼이 나갔제. 나 살라고 내려온 거 아닌데, 딸이 원망 안해길 바래야지."

남으로 내려온 할머닌 식모살이를 하며 남편을 찾았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을 만나 살림을 꾸렸으나 북에 두고 온 딸 생각에 밤마다 눈물 바람, 잠도 못이루는 날이 많았단다.

"맨날 대청마루에 나가 달을 봤어. '우리 보배도 저 달 보고 있겄지요? 우리 보배가 보는 달 나도 보겄소. 우리 보배가 보는 별 나도 보겄소' 하면서…."

할머니는 딸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수양딸을 아홉이나 삼았다고 했다. 그 중 둘은 호적에도 올렸다. 할머니 마음고생을 아는 가족들이 흔쾌히 동의한 것이다. 할머닌 북에 두고 온 딸을 만나려고 모든 수단을 다 썼다고 했다. 지난 10년간 이산가족 상봉을 계속 신청했지만 기별이 없어 중국 브로커를 통해 만나려다 엄청난 수수료 때문에 포기한 사연도 전했다. 할머닌 딸 얼굴 봤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세기 넘게 기다려 잠깐 얼굴 보고 돌아선 애절함을 서럽게 털어놓았다.

"하룻밤도 안 재워. 몸뚱아리 좀 만지며 자고 싶었는데 그걸 못하게 해. 우리 보배, 네 살 때도 할머니랑 자고 나랑 못 잤는데 다시 만나면 같이 잘 수 있으려나? 기자 양반, 나 인타뷰 하면 또 만나게 해줄라요? 좀 해주소."

[수감자 어머니] "그래도 내 새낀데 어쩌겠나"

자식을 가까이 두고도 만날 수 없는 사람, 아니 어쩌면 자식이 무서워 숨어 사는 사람. 슬프지만 우리 곁에는 이런 어머니들도 있다. "편히 눈 감을 수 있는 '방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어느 할머니의 소박한 바람이 참 어려운 숙제로 다가온다.

이 할머니의 막내 아들 김재화(가명)씨는 전과 6범이다. 위조수표를 유통시키다 적발됐다고 한다. 폭력 전과도 있어 형량이 무겁다. 인천구치소 김홍만 소장은 그를 지독한 말썽쟁이로 기억했다. 벽에 머리를 찧어 자해를 하고 볼펜 스프링을 먹어 자살을 시도를 하는 등 위험한 사고도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종교에 귀의해 새사람이 됐다며 교화의 의미를 찾게 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할머니는 이런 막내 소식에 눈빛이 떨렸다. "착실한 애였는데…"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할머니에겐 자식이 넷 있다. 큰딸은 어려서 죽고 큰아들은 열살 무렵 교통사고로 죽었다. 큰아들이 죽고 할아버진 정신을 놓았다.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할머니 혼자 꾸려야 했다. 공사장에서 모래짐 지고 철사 뜯고 생선 팔고 양말 팔고 안 해본 일 없이 근근이 살림을 꾸렸다. 새벽같이 나가 밤늦게 들어왔다. 아이들 자는 모습도 피곤에 지쳐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집 밖으로 돌며 엇나갔다. 둘째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2주일만에 돌아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둘째아들은 지금까지도 돈을 요구하고 할머니를 괴롭힌다.

"원래 안 그랬는데 중학교 때 본드를 하더니 이상해진 것 같아. 막 살림살이 부수고 때릴 때는 내 아들이지만 무서워."

현재 할머닌 남동생 집에 숨어 살고 있다. 둘째아들이 집안에서 난동을 부리자 막내아들은 형을 피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할머닌 아들을 붙잡고 너마저 그러면 못 산다고 애원했지만 쉽게 고쳐지진 않았다. 처음  막내아들이 구속됐단 소식을 들었을 땐 사는 걸 그만두고 싶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말도 못하게 착했어. 어디 나가도 꼭 뒤돌아보고, 항상 '엄마 좀만 더 고생해. 내가 돈 벌면 호강시켜 줄게. 기다려' 그렇게 말하던 애야. 다 부모 잘못 만나서 그래. 남들처럼 못 먹이고 못 입혔어."

할머닌 감기가 심했다. 그런데도 병원에 못 간다고 했다. 부양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아들이 있어 기초수급대상자에서 제외돼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아들을 원망해본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내 새낀데 어쩌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따가운 질문에도 할머닌 "모든 게 내 탓"이라 했다. 부모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자식이건만, 엄마는 자식이 세상에 저지른 죄까지 껴안으려 한다. 다 엄마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사는 게 바빠서 애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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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인권> 11월·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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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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