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쿠치바 전설>겉표지
노블마인
<아카쿠치바 전설>은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세 명의 여성을 토대로 일본사회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첫 번째는 1953년부터 1975년까지를 이야기하는 ‘아카쿠치바 만요’다. 만요는 버려진 아이였지만 마음 착한 양부모가 그녀를 키워 살리게 된다. 그녀는 특이한 재능을 갖고 있다. 미래를 볼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는다. 만요가 살던 시대는 ‘과학’이 앞장서던 시기였다. 뭐든지 과학적인 것이 우선되는 시대였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미신이라고 불리던 시대다.
이 시절에 만요는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된다. 그 가문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명문가였다. 그곳에서 만요를 며느리로 택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곳은 마을을 지탱하는 사업을 일으킨 곳으로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카쿠치바 전설>은 만요가 며느리가 된 시기를 기점으로 그녀를 통해 일본이 근대화로 접어드는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문화나 직업 따위로 그 시절을 엿볼 수 있게 해주고 마을에 일어난 일들을 통해 일본 근대화의 폐해 등을 상상하게 해준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만요는 마을 사람들만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보는 사람들도 놀라게 할 만큼 그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안내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1979년에 이르러 만요의 딸 ‘아카쿠치바 게마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게마리의 이야기는 1998년까지 이어지는데 그녀의 삶은 경제발전을 한 일본의 뒷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게마리는 폭주족이었다. 어머니 세대와 달리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이웃마을의 젊은이들과 전쟁을 할 줄도 알았고 공부 같은 걸 내팽겨칠 줄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 세대를 알고 있는 게마리는 책임감이 있었다. 어머니 세대를 도울 줄 알았던 것이다. 질주와 책임감.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 같은 두 가지를 모두 지닌 셈이다. 게마리로 하여금 그 시대 젊은이들의 생각을 엿보게 하는 <아카쿠치바 전설>은 여전히 그 시대의 풍속을 그리는데 소홀하지 않고 있다.
그 시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의 세계가 혼합되기 시작한다. 게마리의 표현을 빌리면 ‘어른이 소녀들을 잡아먹는 일’이 생긴다. 게마리는 그 사실에 당황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문제였지만, 점점 확산된다. 게마리처럼 대놓고 ‘불량소녀’라고 하는 사람들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착해 보이는 사람들,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악랄해지고 있었다. 이지메 현상이 나타나는 것까지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 번째 여자는 게마리의 딸 ‘아카쿠치바 도코’다. 도코는 만요나 게마리와 다르게 하고 싶은 것이 없다. 일에 대한 욕심도 없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욕망도 없다. 뭔가 체념한 것 같은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어른들이 이룬 것이 자신의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있다. 그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아니다. 전형적인 니트족인 셈이다.
이처럼 <아카쿠치바 전설>은 아카쿠치바 가문의 여자들로 그 시대를 엿보게 해주는데 그 솜씨가 제법 인상적이다. 가족들에게 일어난 사건 등으로 자연스럽게 문화를 짚어주고 있기에 그렇다. 억지스러울 수도 있을 법한 시도였지만 소설은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가족사와 시대사를 엮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풍랑을 헤쳐 가는 가문의 모습은 소설적인 서사가 뛰어나다. 소설적인 재미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가족사와 시대사를 절묘하게 만나게 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오랜만에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는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노블마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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