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 정말 깁니다.아마 레 시내를 둘둘 말아버린 것 같았습니다.
신영미
돌아오는 길. 돌체와 한동안 말없이 걷는다. 그리고 그에게 건넨 첫 마디.
“
대단했어요!”
“네. 그렇죠. 우리에게 달라이 라마는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예요.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요. 그는 우리에게 우리 모두 참인간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스승입니다.”오후 햇살이 여전히 따가웠지만 고약하지는 않았다. 양산을 꺼내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렀다.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따스한 저녁상을 해먹고 싶었다. 배, 토마토, 사과와 몇 가지 야채를 사고 돌아서려는데 언뜻 보면 꼭 두부 같은 라다크에서 바로 생산되어 포장되지 않은 생 치즈덩어리가 있었다. 조금 떼어 먹어보니 우유맛이 진하게 풍기고 그 발효된 삭힌 맛이 굿! 이 녀석도 한 덩어리 샀다.
젬마와 함께 라다키 빵을 노릇노릇하게 굽고 있다. 모듬식 야채볶음과 걸죽한 토마토 스프를 만들고, 과일을 깎아 보기 좋게 접시위에 올려놓은 후 마지막으로 짜이를 넉넉히 한 솥 끓였다. 덕분에 제법 푸짐한 저녁식탁이 차려졌다.
창밖으로 나뭇가지에 잎들이 바람에 부딪히는지 흔들리고 거뭇거뭇 그늘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한다. 돌체도 일찍 돌아와 있었다. 돌체는 계산서와 함께 마날리까지의 버스표 한 장, 델리까지의 버스표 한 장, 두 가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에게 성실히 일을 처리해준 것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내일 새벽, 동트기 전에 공영버스터미널까지 실어줄 택시가 이곳 게스트하우스 골목 앞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잊고 지냈던 시간의 흐름 속으로 다시 편입해갈 것이고 나를 태우고 쏜살같이 달려갈 것이다.
“한국에서 교사였다고 했죠? 그럼, 부자인가요?”
“글쎄요. 소위 중산층? 안전한 표현의 일종이죠.”“안전한 표현? 한국어는 같은 말도 위험한 표현과 안전한 표현으로 나뉘나 보죠? 한국어를 배우려면 얼마나 걸려요?”
“뭐, 동기나 의지, 노력에 따라 다르지만 한 2-3년 정도?”
“전 영어를 3년에 마스터하고, 불어를 3개월 배워서 대충 써먹고, 5개 언어를 합니다. 라다키, 티벳, 힌디어, 영어, 중국어.”
“오! 그래요?.”“하지만 10개 국어를 채울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구요.”
“오호! 대단해요. 꼭 이룰 수 있을 거예요. 돌체씨라면.”
“그렇게 생각해요? 저에 대한 인상이 좋았나봐요?”“저런! 그렇게 되나요? 하하. 글쎄요. 사업가 같이 분주하고, 어떤 강한 열정 내지 욕망 같은 것이 많아 보이고요.”
“전 욕망 많지 않아요.”
“그럼. 에너지가 많은 분이라고 해두죠. 그러니까 그 에너지를 잘 쓰면 가능할 거예요. 좋은 꿈이예요.”
“제 꿈이 세계여행인 건 아니에요. 다만 하나의 인생 이벤트이고요. 궁극적인 건 아니죠.”
“그럼?”
“행복하게 죽는 거죠..”
“행복이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니에요? 행복이란 그것보단 좀 더 밝아야 어울리지 않나요?”
“라다키인들은 죽음을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태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죠. 잘 살아야 가능한 것이죠. 우리 라다키들은 죽음의 순간에 행복하고 편안하게 붓다의 세계로 가기를 늘 기도해요.” 저녁상이 물려지자, 돌체가 맥주와 컵을 꺼내온다. 오늘은 한 잔 해야겠다고 맘먹고 있었기에 기꺼이 그의 잔을 받았다. 톡 쏘는 맥주의 노랑 액체가 거품과 함께 입안에서 목을 타고 넘어갈 때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부르르 떨 때마다 그 모습에 돌체는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소파 뒤로 넘어간다. 내보기엔 그는 벌써 취했다.
딴딴라풍의 라다크 음악이 경쾌하게 흘러나오고 돌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지. 술과 음악! 그 다음엔 춤! 그 다음엔? 오늘 밤에는 작별의 말을 나눠야 한다. 그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은? 답이 풀리다, 이렇게 막힐 때는 막다른 골목 앞에 와있는 느낌. 그리고 뭔가 끝이 없을 거 같은 미로에 갇힌 느낌.
그가 춤에 점점 몰입하고 있다. 느릿하면서도 온몸의 살들이 긴장하듯 꿈틀거리는 춤동작은 사막의 뱀이 추르르 뜨거운 모래 위에 자신의 몸을 비비며 사막 끝 어딘가로 떠나는 듯했다. 그의 이마와 콧등, 목 줄기에 끈적끈적하고 진한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너무 일찍 말라버린 탓이었을까. 맺힌 땀방울은 더 이상 온몸을 휘감지 못하고, 지그시 감긴 두 눈과 깍지 끼듯 마주잡은 두 손 끝에서 멈춰버렸다. 그곳에서 뭔지 모를 삶의 격렬한 욕망과 감정의 골이 차가운 달빛 아래 이지러지고 억제되어 끝내 토해지지 못한 걸까? 그의 손놀림이 아슬아슬 허공에서 느닷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그의 춤사위와 몸짓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늘 지붕 꼭대기에서 뭔가를 찾으러 꾸역꾸역 올라오는 아랫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또 헤어지기를 짜이 마시듯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라다크! 북적거리던 관광시즌이 끝나 적막의 겨울이 찾아오면 이곳 사람들은 무얼 하며 지낼지? 까닭모를 감상적 연민으로 힘이 들었다.
그런 나를 부정하듯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일어나 막춤을 추었다. 왜 늘 이렇게 마지막 순간이란 자각이 들어야 용기를 내는 걸까? 수피음악 콘서트에서도 차마 추지 못했던 춤을, 이 좁은 방안에서. 할아버지와 젬마가 키키덕거리며 박수를 치는지 음악과 웃음소리 그리고 박수소리가 섞이고 엉켜 귀전에서 파도 친다. 이번엔 젬마의 손을 이끌어 빙글빙글 돌았다. 셋이 다시 빙글빙글 돈다. 어지러웠다. 음악이 멈췄을 때에는 기진맥진 더 이상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이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뭔가 나눌 이야기를 남겨두지 못했다. 할아버지 얼굴의 주름이 불빛 아래 더욱 깊어지고, 젬마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가만히 그녀를 껴안아주었다. 게스트가 아니라 식구로 받아준 이들이 사무치게 고마웠기에. 돌마와 젬마, 돌체와 돌체의 파파! 히말라야 꼭대기 어딘가에 또 다른 일촌을 남기게 된 것일까?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한 번 더 별들을 보고 싶어 마당으로 나왔다.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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