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넌 무엇을 보았느냐고 내게 묻는다

[평범한 아줌마 선생의 인도여행 21] 레에서의 마지막 날

등록 2008.01.26 09:24수정 2008.01.2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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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토,
일정을 바꾸다

아침나절, 어스렁거리다 살구나무 아래 살구를 주워 배어먹고 있는데 돌체가 껑충껑충 뛰듯이 들어왔다. 일정을 바꾸자는 것이다. 도저히 스리나가르로 내려가면 비행기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거다. 가이드북의 계산법이 아닌 현지인 여행사 사장의 감각에 따르기로 했다. 행로를 바꾸어 다시 마날리로 내려가기로 하고, 마날리로 가는 버스와 델리행 버스를 각각 자신이 예매해 주겠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돌체와 거리로 나섰다. 따가운 햇살에 절로 눈이 따갑고 이맛살이 구겨진다. 우산을 꺼내 펴들고는 돌체에게도 받쳐주는 시늉을 하자,


“괜찮아요….”
“양산이 있는데 가리지 그래요? 함께 써요.”
“하하. 이런 날씨에 익숙해져야 해요. 오늘은 양산을 쓰고 잠시 시원하겠지만, 내일은요?”


곁눈질로 '흥'하며 처다보는 시선이 귀여워라.
“호오! 그렇군요. 미처 거기까진 생각 못했네요.”

그는 내가 백기를 들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면 무척 행복해했다.

돌체와 돌체의 애마  장난끼와 유머가 그득한 라다키 청년으로, 라다크를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발로 뛰는 책임감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이 사진을 보니 또 웃음이 나네요. 이때 사진을 찍어준다니까, 과장된 몸짓으로 섹시한 포즈를 취해서 혼내주고는, 라다키스럽게 서보라하곤 겨우 찍은 것입니다.
돌체와 돌체의 애마 장난끼와 유머가 그득한 라다키 청년으로, 라다크를 위해 누구보다도 먼저 발로 뛰는 책임감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이 사진을 보니 또 웃음이 나네요. 이때 사진을 찍어준다니까, 과장된 몸짓으로 섹시한 포즈를 취해서 혼내주고는, 라다키스럽게 서보라하곤 겨우 찍은 것입니다. 신영미

간단히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려는데, 거리에 윤기가 흐르는 것 같은 반짝반짝하는 느낌!  ‘어라? 뭐지? 무엇이 달라진 걸까?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 수상한 변화의 정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수 100% 케쉬미어 원단을 자랑하는 우아한 숄들이 진열되어있는 의류가게 안, 어제와 다름없이 손님 하나 없다. 먼지 뽀얗게 내려앉은 부처상, 담뱃대, 나침반들, 암만해도 팔릴 기미 없는 기념품 가게들, 가게 앞에 앉아 지나는 여행자들을 뒤따라 단조로이 옮겨가는 인도인 점원의 시선, ‘시설 정비 중’ 안내판이 써 붙여져 있는 인터넷가게, 여행사 앞 한 무리의 외국인 여행자들이 여행을 위해 지프에 배낭을 잔뜩 실으며 가이드인 현지인에게 뭔가 불평하는 모습들….


이 모두 판에 박힌 듯 어제와 다름없는 관광지로서의 레 거리일 뿐인데. 그런데 뭔가 알 수 없지만 들뜨고 밝아진 건 왜일까? 마치 명절날을 앞두고 식구들에게 평소 먹여보지 못한 고기 반찬을 준비하시던 어머니, 그분의 해맑으셨던 그 분주함 같은. 포트 로드(Fort Road)골목을 막 빠져나오는데, 한 할머니가 빗자루로 길바닥을 쓸고 계셨다. 퍼뜩, 떠오르는 이미지! 

‘아하! 그래! 그거였구나. 그랬구나!’


포르르 웃었다. ‘그’는 뭣보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분 같다. 지나는 여행객이 ‘그’와 뭔 상관있다고 이리 좋아지는 거지?  

인산인해

거리 시내는 온통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에는 오색 깃발들이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 만국기처럼 휘날리고 거리는 비온 후처럼 청명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다. 그동안 고이 간직해두었던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다. 두 손을 기도하듯 맞붙이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분’만을 기다리며 손에는 '옴마니 반메흠'의 마니차와 향을 피우고 있다. 뽀르르 향의 연기가 바람을 타고 눈에 들어와 눈물이 난다.

오색깃발 흰색, 빨간색, 초록색, 파랑색, 노랑색..각각 의미하는 바가 있다지요.
오색깃발흰색, 빨간색, 초록색, 파랑색, 노랑색..각각 의미하는 바가 있다지요. 신영미

기다리는 사람들 안경 쓴 할아버지가 들고계신 것이 마니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돌리면서, '옴마니 반메흠, 옴마니 반메흠'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안경 쓴 할아버지가 들고계신 것이 마니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돌리면서, '옴마니 반메흠, 옴마니 반메흠' 합니다.신영미

인파를 정리하고 길을 확보하기 위해 경찰과 군인들이 대거 떴다. 창파(Changpa) 곰파 앞에는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을 구분하여 질서유지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주변 가게들과 은행까지도 모두 영업 중지, 2,3층의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닫도록 확성기로 떠들고 있다. 인도는 사람들의 물결로 넘치고, 차도는 완벽하게 차량 통제된 채 행사 요원들과 몇몇 사진 기자들만 왔다 갔다 한다.

아주 특별한 날  오색깃발도 뜨고, 라다크인들뿐아니라, 군인들도 뜨고, 기자들고 뜨고, 오늘 하루는 모두들 들뜨는 날인가봅니다.
아주 특별한 날 오색깃발도 뜨고, 라다크인들뿐아니라, 군인들도 뜨고, 기자들고 뜨고, 오늘 하루는 모두들 들뜨는 날인가봅니다.신영미

   
카메라 기자들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카메라 기자들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신영미

라다크 기자양반 앞에서 보면 산적같은 사진기자. 라다크전통복장을 기본으로 아래치마속에 바지와 등산화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라다크 기자양반앞에서 보면 산적같은 사진기자. 라다크전통복장을 기본으로 아래치마속에 바지와 등산화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신영미

갑자기 사람들이 '와아아'하고 움직이며 차로까지 밀려나오고, 모두들 고개가 한쪽 방향으로 쏠렸는데, 알고 보니 그곳 고위층 관리였나 보다. 다들 실망스런 모습으로 되돌아왔지만 대열이 한 번 흩어지고 나니 그어놓은 안전선 안으로 인파를 수습하는 게 호락호락 쉽지 않다.

어떤 기다림

그런데,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한쪽 구석에 거시기한 행색의 남자! 다들 서서 고개를 빼들고 조금이라도 더 해바라기 하려는 와중에 가부좌한 채 거의 웃통을 벗은 상태.

“일본분이세요? 그런데, 무슨?”
“네. 기다리고 있스무니다.”
“뭘 기다리신다는 건지요? ‘그 분’일 테죠?”
“그 분도 그분이지만, 제겐 더 절실하게 기다리는 게 있어요.”
“?”

“며칠 전에 버스터미널에서 표 끊고 델리행 버스를 기다리다가 잠깐 졸았는데 배낭이 없어졌어요.”
“저런…그래서요?”
“제 배낭이 돌아올 것을 믿습니다.”
“며칠 지나셨다면서요. 그럼?”
“오늘은 라다크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모이는 날이니, 오늘은 분명 찾아오무니다.”


일본인은 말을 마치고는 가슴을 쿵쿵 쳐댄다. 자세히 보니 가슴에 웬 현대판 주홍글씨를 달고 있었다.     

'MY BAG LOST, MY MIND LOST!'

그의 기대처럼, 어쩜 오늘은 그리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꼭 가방도 되찾고, 그의 마음도 되찾게 되길!

여행자들도 즐거운 날 외국인들과 라다크사람들을 구분하여 자리를 마련해두었더군요.
여행자들도 즐거운 날외국인들과 라다크사람들을 구분하여 자리를 마련해두었더군요. 신영미

두 여배우의 퍼포먼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오신다는 ‘그분’은 여태 오시지 않아 조금씩 지루해지고 있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꾸역꾸역 모여들게 하는 걸까?’를 잠시 생각하는 틈에 꼬마 여자아이가 아장아장 혼자 차로 가운데로 나가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모여든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그러곤 아예 춤을 출 듯이 깡총거리기 시작했다. 구부정한 할머니가 아이를 잡으려하지만 아이는 이미 자신에 쏠린 시선을 즐긴다는 듯 재밌어 죽겠단다. 뒤쫓는 할머니와 짧은 걸음으로 더 영민한 어린 손녀사이의 추격전. 다들 까르르 웃는다. 졸지에 두 배우가 열연하는 연극무대와 관객의 관계가 이뤄진 셈. 행사요원들도 잠시 팔짱을 낀 채 관람하는 자세.

'그 분’이 오시다

누군가가 후다닥 그 여자아이를 낚아채듯 허리를 꺾어 안고는 길을 비우자, 드디어 검은 세단이 한 대 들어왔다. 달라이 라마였다.

드디어 도착하시나 봅니다. 사람들이 술렁술렁하기 시작합니다. 맨 앞의 티벳승이 중요 행사요원인듯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하시나 봅니다.사람들이 술렁술렁하기 시작합니다. 맨 앞의 티벳승이 중요 행사요원인듯했습니다. 신영미

  
라다크 여인들 간절하네요.
라다크 여인들간절하네요. 신영미

'와아하' 파도처럼 삽시간에 사람들이 차 주위로 몰려오는 통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카메라가 번쩍번쩍, 타다다닥 셔터 누르는 소리도 한소음한다. 라마가 탄 차는 곰파 앞에서 멈췄다.

 이 차 뒷자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이 차 뒷자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신영미

라마께서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다. 곰파 정문까지의 남은 거리는 겨우 10여 미터나 될까? 이미 곰파 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친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을 위해 아침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모였고 어제부터 거리를 청소했단다.

그런 이들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달라이 라마는 세상에 제일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사람들에게 안면 가득 미소를 나눠주고 있다. 안경 너머로 눈빛이 깊고도 인자하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마다 깊은 자애의 강물이 넘친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라마께서 막 내 앞을 지나시는데, 나도 모르게 팔이 뚝 떨어지더니 카메라 찍을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솔직히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단 사실을 잊었다고 해야 정확할 거 같다. 머릿속이 눈밭처럼 하애지더니 그냥 멍해져 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을까? 눈앞을 지나시는 동안의 시간이란. 하지만, 그 여운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얼마나 깊이 우리들 마음속에 스며들어 올지 알수없다.  
역시 간절합니다.  간절하면 절로 손이 모아지나봅니다.
역시 간절합니다. 간절하면 절로 손이 모아지나봅니다. 신영미

두 노인

갑자기 옆에 한 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코가 닿도록 넙죽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를 밟고 지나소서’하듯이 낮게. 또한, 그의 동작이 어찌나 민첩하고 주저함이 없었던지 반사적으로 덩달아 무릎 꿇고 절을 할 뻔했다. 그러나 무릎을 꾸부리고 그에게 다가간 건 오히려 살아있는 붓다라 일컬어지는 달라이 라마였다.

그 노인은 라마께 뭔가 말을 했다. 라마께선 그런 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런 다음 노인의 두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어깨를 도닥여주셨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바로 전까지 만해도 서로 밀치고 조금의 틈에도 비집고 몸싸움 하던 동작들이 일시에 멈추어진 것이다.

놀라운 고요와 고요한 가운데의 평화였다!

시간의 흐름이란 이렇게 멈춰지는 것이로구나. 화면은 정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난 뭔가를 보았던 거 같다. 그 노인의 눈물! 눈곱 덕지덕지한 눈가에 맺힌. 그는 인도인 걸인처럼 보였다. 두 사람, 같은 시대를 살면서 비슷하게 늙어버린 두 노인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고갔을지 나로서는 알도리가 없다. 그가 왜 눈물을 흘린 것일까도 짐작만 할 뿐이다.

아무튼, 두 노인을 바라보면서, 찰나와도 같은 시간, 마음속에 느슨하게 늘어져 오랫동안 건드리지 않고 있던 어떤 마음선이 '팅'하고 맑게 울리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께서 곰파 안으로 들어가자 철거덕 철문이 닫히고 군인들이 다시 철문 앞에 줄지어 섰지만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저 문이 다시 열리면 라마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한사코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다시 한번 자문해본다.

'이 척박한 히말라야에 둥지를 틀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힘을 얻는 건 많은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것을 서로 나누데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주는 그 사람.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크거나 작거나에 구분됨이 없이 모두 고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그 사람, 바로 그 사람을 통해 우리 안의 성스러움(holiness)을 일깨우고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 가득 영혼의 정화를 받기 위해서가 아닐는지.'

인파가 흩어질 줄 모릅니다. 이미 라마께선 곰파안으로 들어가셨는데도 말이죠. 아마 오늘 하루는 이렇게 보낼 것입니다.
인파가 흩어질 줄 모릅니다.이미 라마께선 곰파안으로 들어가셨는데도 말이죠. 아마 오늘 하루는 이렇게 보낼 것입니다. 신영미

  
줄이 정말 깁니다. 아마 레 시내를 둘둘 말아버린 것 같았습니다.
줄이 정말 깁니다.아마 레 시내를 둘둘 말아버린 것 같았습니다. 신영미

돌아오는 길. 돌체와 한동안 말없이 걷는다. 그리고 그에게 건넨 첫 마디.

대단했어요!”
“네. 그렇죠. 우리에게 달라이 라마는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예요.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요. 그는 우리에게 우리 모두 참인간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스승입니다.”


오후 햇살이 여전히 따가웠지만 고약하지는 않았다. 양산을 꺼내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렀다.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과 따스한 저녁상을 해먹고 싶었다. 배, 토마토, 사과와 몇 가지 야채를 사고 돌아서려는데 언뜻 보면 꼭 두부 같은 라다크에서 바로 생산되어 포장되지 않은 생 치즈덩어리가 있었다. 조금 떼어 먹어보니 우유맛이 진하게 풍기고 그 발효된 삭힌 맛이 굿! 이 녀석도 한 덩어리 샀다.

  젬마와 함께 라다키 빵을 노릇노릇하게 굽고 있다. 모듬식 야채볶음과 걸죽한 토마토 스프를 만들고, 과일을 깎아 보기 좋게 접시위에 올려놓은 후 마지막으로 짜이를 넉넉히 한 솥 끓였다. 덕분에 제법 푸짐한 저녁식탁이 차려졌다.

창밖으로 나뭇가지에 잎들이 바람에 부딪히는지 흔들리고 거뭇거뭇 그늘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한다. 돌체도 일찍 돌아와 있었다. 돌체는 계산서와 함께 마날리까지의 버스표 한 장, 델리까지의 버스표 한 장, 두 가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에게 성실히 일을 처리해준 것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내일 새벽, 동트기 전에 공영버스터미널까지 실어줄 택시가 이곳 게스트하우스 골목 앞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잊고 지냈던 시간의 흐름 속으로 다시 편입해갈 것이고 나를 태우고 쏜살같이 달려갈 것이다.

“한국에서 교사였다고 했죠? 그럼, 부자인가요?”
“글쎄요. 소위 중산층? 안전한 표현의 일종이죠.”

“안전한 표현? 한국어는 같은 말도 위험한 표현과 안전한 표현으로 나뉘나 보죠? 한국어를 배우려면 얼마나 걸려요?”
“뭐, 동기나 의지, 노력에 따라 다르지만 한 2-3년 정도?”
“전 영어를 3년에 마스터하고, 불어를 3개월 배워서 대충 써먹고, 5개 언어를 합니다. 라다키, 티벳, 힌디어, 영어, 중국어.”
“오! 그래요?.”

“하지만 10개 국어를 채울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구요.”
“오호! 대단해요. 꼭 이룰 수 있을 거예요. 돌체씨라면.”

“그렇게 생각해요? 저에 대한 인상이 좋았나봐요?”
“저런! 그렇게 되나요? 하하. 글쎄요. 사업가 같이 분주하고, 어떤 강한 열정 내지 욕망 같은 것이 많아 보이고요.”
“전 욕망 많지 않아요.”
“그럼. 에너지가 많은 분이라고 해두죠. 그러니까 그 에너지를 잘 쓰면 가능할 거예요. 좋은 꿈이예요.”
“제 꿈이 세계여행인 건 아니에요. 다만 하나의 인생 이벤트이고요. 궁극적인 건 아니죠.”
“그럼?”
“행복하게 죽는 거죠..”
“행복이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니에요? 행복이란 그것보단 좀 더 밝아야 어울리지 않나요?”
“라다키인들은 죽음을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태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죠. 잘 살아야 가능한 것이죠. 우리 라다키들은 죽음의 순간에 행복하고 편안하게 붓다의 세계로 가기를 늘 기도해요.”


저녁상이 물려지자, 돌체가 맥주와 컵을 꺼내온다. 오늘은 한 잔 해야겠다고 맘먹고 있었기에 기꺼이 그의 잔을 받았다. 톡 쏘는 맥주의 노랑 액체가 거품과 함께 입안에서 목을 타고 넘어갈 때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부르르 떨 때마다 그 모습에 돌체는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소파 뒤로 넘어간다. 내보기엔 그는 벌써 취했다. 

딴딴라풍의 라다크 음악이 경쾌하게 흘러나오고 돌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지. 술과 음악! 그 다음엔 춤! 그 다음엔? 오늘 밤에는 작별의 말을 나눠야 한다. 그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은? 답이 풀리다, 이렇게 막힐 때는 막다른 골목 앞에 와있는 느낌. 그리고 뭔가 끝이 없을 거 같은 미로에 갇힌 느낌.

그가 춤에 점점 몰입하고 있다. 느릿하면서도 온몸의 살들이 긴장하듯 꿈틀거리는 춤동작은 사막의 뱀이 추르르 뜨거운 모래 위에 자신의 몸을 비비며 사막 끝 어딘가로 떠나는 듯했다. 그의 이마와 콧등, 목 줄기에 끈적끈적하고 진한 땀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너무 일찍 말라버린 탓이었을까. 맺힌 땀방울은 더 이상 온몸을 휘감지 못하고, 지그시 감긴 두 눈과 깍지 끼듯 마주잡은 두 손 끝에서 멈춰버렸다. 그곳에서 뭔지 모를 삶의 격렬한 욕망과 감정의 골이 차가운 달빛 아래 이지러지고 억제되어 끝내 토해지지 못한 걸까? 그의 손놀림이 아슬아슬 허공에서 느닷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 그의 춤사위와 몸짓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늘 지붕 꼭대기에서 뭔가를 찾으러 꾸역꾸역 올라오는 아랫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또 헤어지기를 짜이 마시듯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라다크! 북적거리던 관광시즌이 끝나 적막의 겨울이 찾아오면 이곳 사람들은 무얼 하며 지낼지? 까닭모를 감상적 연민으로 힘이 들었다.

그런 나를 부정하듯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일어나 막춤을 추었다. 왜 늘 이렇게 마지막 순간이란 자각이 들어야 용기를 내는 걸까? 수피음악 콘서트에서도 차마 추지 못했던 춤을, 이 좁은 방안에서. 할아버지와 젬마가 키키덕거리며 박수를 치는지 음악과 웃음소리 그리고 박수소리가 섞이고 엉켜 귀전에서 파도 친다. 이번엔 젬마의 손을 이끌어 빙글빙글 돌았다. 셋이 다시 빙글빙글 돈다. 어지러웠다. 음악이 멈췄을 때에는 기진맥진 더 이상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이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뭔가 나눌 이야기를 남겨두지 못했다. 할아버지 얼굴의 주름이 불빛 아래 더욱 깊어지고, 젬마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가만히 그녀를 껴안아주었다. 게스트가 아니라 식구로 받아준 이들이 사무치게 고마웠기에. 돌마와 젬마, 돌체와 돌체의 파파! 히말라야 꼭대기 어딘가에 또 다른 일촌을 남기게 된 것일까?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한 번 더 별들을 보고 싶어 마당으로 나왔다. 여전히 아름답다. 
#인도여행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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