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8.02.07 10:39수정 2008.02.07 10:39
오랜만에 경주 불국사를 찾았다. 신라의 오래된 역사를 가장 잘 나타내는 상품은 누가 뭐라 해도 불국사와 석굴암일 것이다. 아마도 석굴암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불상일 것이다. 그리고 불국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설화와 보물을 간직한 절일 것이다. 다보탑이며 석가탑, 청운교·백운교를 돌고 돌아 대웅전 앞마당에 켜켜이 쌓이는 신라 천년의 향은 오늘도 여전히 토함산 자락에서 불국사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국사 입구를 지나 조금 걸어가니 눈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진입로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오른쪽으로 슬며시 쳐다보니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을 주는 연못 하나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얼어버린 호수를 잠시 쳐다보았다. 투명한 얼음 빛이 햇살을 부드럽게 반사하고 있었다. 그 반사의 흐름을 쳐다보며 잠시 눈을 감아 본다. 그리고 천오백년 전의 신라를 생각해본다. 무려 천년의 역사를 지닌 왕조. 세계 어디를 내놔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연륜이러니.
연못을 지나 석축 사이로 쌓인 눈 더미를 쳐다본다. 응달진 곳에 오종종하게 늘어선 눈들의 세포는 하얗다 못해 회색빛을 엷게 발하고 있었다. 그 빛에 취해 다시 눈을 감아본다. 그리고 천오백년 전에 이곳을 다녀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떠올려 본다. 아마 그들도 그 시절에 눈을 감고 다가올 천오백년 후의 미래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나는 동시대인이다. 그들과 나는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자하문이 눈에 들어오고 그 밑에 아름다운 자태로 말없이 내방객을 맞이하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보인다. 이끼는 저 돌들마저 푸르게 만들었다. 돌들은 눈물겨운 고백을 하고 있었다. 나의 몸에 서린 역사의 흔적을 가엽게 보아달라고.
대웅전 앞마당에 쌓인 눈의 궤적이 가엽다.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는 눈 사이로 황토 빛 흙들이 살결을 조금씩 내놓고 있었다. 저 흙들과 대웅전 기와를 빚은 흙들은 분명 그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두 흙들은 동일한 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훌륭한 장인의 솜씨에 의해 한 덩어리는 기와가 되었을 것이고, 또 한 덩어리는 대웅전 앞마당을 장식했을 것이다.
앳된 얼굴의 아가씨들이 대웅전의 뒷담 기와에 쌓인 눈에 경탄을 보내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무에 저리 즐거운지. 재잘거리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처녀들의 목소리가 청아하다. 그 청아한 소음이 어찌 그리 정겨운지. 청아한 소음은 대웅전 앞뜰에서 뒷담으로, 다시 지붕 골 사이로 쌓인 눈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간다.
내려가는 길. 햇살은 여전히 투명하게 불국사의 눈을 비추고 있었다.
2008.02.07 10:39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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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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