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정문(자료 사진).
권우성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신고전파 경제학이 무엇이고 마르크스경제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이야기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생각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회과학대학을 지망할 때만 해도 내게는 학문이라는 것과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이것은 '상아탑'이나 '지성인'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난해함 자체를 자부심의 원천으로 삼는 감정과는 전연 다른 것이었으니, 아주 구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환상이란 바로 학문과 기술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내 생각은 지극히 단순했다. 기술이 다른 목적에 이용되는 맹목적인 수단인 데 비해, 학문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목적의식적인 활동이며, 그 목적은 대개 사회적 행복이다. 그리고 대학은 기술이 아니라 학문을 하는 공간이라는 것.
그 때 나는 적어도 내 인생에서 4년 동안만은 학문을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사회과학대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였다. 법과대학이나 경영대학 등의 다른 단과대학들에 대해서는 특정한 직종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잠시 거쳐 가는, 이미 기술학원이 되어 버린 곳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던 데 비해, 사회과학대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곳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확신은 별다른 근거가 없었던 것이었으니,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현실보다는 이미지에 입각해서 진로를 선택했던 셈이다. 또 참 "철이 없었다." 그 '서울대'에 들어간다면 먹고 살 걱정은 덜 수 있을 테니 다른 면도 따져보자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니 말이다.
그 시절, 내게 경제학은 '진짜 학문'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착각은 여러 학과 중에서 하필 경제학부를 선택하게 된 데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했다. 내가 처음의 계획과 달리 경제학부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경제학이 먹고사는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니만큼 나중에 어디 가서 무엇을 하게 되건 쓸모가 있으리라는 '현실적인' 생각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제학의 목적이 경세제민이라는 여전히 환상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첫 번째 판단은 과연 꽤 현실적인 것이었지만, 두 번째 판단은 거의 완전히 환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처음으로 얻었던 것은 대학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인 2004년 봄의 경제학원론 수업시간이었다. 어떠한 전공을 선택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다소 때 이른 고민을 품은 채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새내기들에게, 담당 교수는 경제학의 대상과 목적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나 자원은 희소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한정된 자원으로부터 최대한의 만족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최적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다."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경제학부로 진로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만약 경제학이 이 교수가 말한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성공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다면, 경제학이 적어도 유용한 기술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누구의 욕망을 위하여 누구의 자원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 답을 겨울에야 얻을 수 있었다. 연말을 앞두고 전공 진입에 대한 고민을 더해가던 시기였다. 경제학에 흠뻑 빠져 경제학의 전도사 노릇을 자임하던 한 선배가 말했다. '경제학'의 어원은 나라의 살림살이(political economy)이지만 그 번역어는 '경세제민'이라고. 결국 경제학은 국민의 물질적 욕구를 최대한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진짜 학문이구나.' 나는 이것이라면 충분히 내 대학생활을 걸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날로 전공 진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람은 잘 살고 싶어 하는 것만큼이나 보람 있게 살고 싶어 하는 법이다.
서울대 경제학부 3년, 경제학에 품었던 기대는 사라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