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 유묵
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몇 해 전, 워싱턴에서 만난 동포 심재호씨의 말이 상기 되었다. 심재호씨는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의 셋째 아드님으로 1987년부터 북한 산하를 20여 차례 누비면서 일천여 이산가족을 찾아준 분이다.
심재호씨는 나에게 남북 동포의 민족 동질성 회복보다 이질성 극복이 더 급한 일이라고 하였다. 분단이 반세기가 넘었지만, 수천 년 같은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우리 겨레이기에 민족 동질성 회복은 남북 동포가 한 자리에 만나 노래 한 곡 같이 부르면 된다고 매우 낙관하였다.
해방 공간에서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에 이바지하다 흉탄에 쓰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은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짙다)'라는 유묵을 남겼는데, 이 글은 바로 몽양의 삶과 사상을 집약하고 있다. 여기서 혈(血)은 피로 곧 '민족'을 말함이요, 수(水)는 물로 곧 '이념'을 말함이다.
"혈농어수(血濃於水)란 '민족은 이념에 앞선다'라고 풀이해야 합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강준식 상임이사가 나에게 힘주어 하는 말이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강대국이 가져다 준 이념에 얽매어 살아왔다. 내 핏줄끼리 만나기는커녕 서로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 제삼국에서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것조차도 죄가 되었던, 동물보다 못한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
한 작가의 소년시절 회상
소설가 전상국 선생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 '내가 겪은 6·25 전쟁'에서 소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열 살 나이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나기 몇 달 전으로 기억한다. 읍내 경찰서 뒷마당에 잡아다 놓았다는 '빨갱이'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경찰서 담벼락에 매달렸다. 어른들이 말하는 빨갱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날 경찰서 뒷마당에 포승에 묶인 채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남자 어른을 보았을 뿐이다. 더 맥빠지는 일은 그 빨갱이 속에 우리 이웃집 아저씨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해방둥이로 태어난 나도 어렸을 때부터 반공교육을 받아왔으며 자랐다. 중공군이나 북한군 병사를 흉악무도한 도깨비로 각인한 채 50년을 더 살았다.
그러다가 1999년 여름 항일유적지 답사차 중국에 가 중공군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다녔는데, 녹두색 제복을 입은 '왕빙'이라는 하사관과 여러 날 같이 지내고는 그를 적대시했던 내 선입관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내 조카나 아들처럼 조그마한 일에도 얼굴을 붉히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평양에서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