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한 곡이면 민족 동질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리랑'을 듣고서

등록 2008.02.28 10:41수정 2008.02.2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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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 작가와 북측 남대현 작가(오른쪽)의 만남. 두 사람은 돈암초등학교 동창생으로 50여 년만에 만났다(2005. 7. 24 평양).
김훈 작가와 북측 남대현 작가(오른쪽)의 만남. 두 사람은 돈암초등학교 동창생으로 50여 년만에 만났다(2005. 7. 24 평양). 박도

민족은 이념에 앞선다

지난 26일 밤, 동평양 대극장에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리랑'이 울려퍼질 때 가슴을 할퀴는 듯한 전율감을 느꼈다. 아마도 그 선율에 짜릿한 감동을 느끼지 않은 겨레는 거의 없었으리라. 보도에 따르면 현지 북한 관객도 눈물을 닦았다고 하며, 이곡이 끝나자 관객들은 10분 넘게 기립 박수를 보냈고, 지휘자 로린 마젤은 세 번이나 다시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은 노래 한 곡 부르면 끝납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 유묵
몽양 여운형 선생 유묵 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몇 해 전, 워싱턴에서 만난 동포 심재호씨의 말이 상기 되었다. 심재호씨는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의 셋째 아드님으로 1987년부터 북한 산하를 20여 차례 누비면서 일천여 이산가족을 찾아준 분이다.

심재호씨는 나에게 남북 동포의 민족 동질성 회복보다 이질성 극복이 더 급한 일이라고 하였다. 분단이 반세기가 넘었지만, 수천 년 같은 역사와 문화를 이어온 우리 겨레이기에 민족 동질성 회복은 남북 동포가 한 자리에 만나 노래 한 곡 같이 부르면 된다고 매우 낙관하였다.

해방 공간에서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에 이바지하다 흉탄에 쓰러진 몽양 여운형 선생은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짙다)'라는 유묵을 남겼는데, 이 글은 바로 몽양의 삶과 사상을 집약하고 있다. 여기서 혈(血)은 피로 곧 '민족'을 말함이요, 수(水)는 물로 곧 '이념'을 말함이다.

"혈농어수(血濃於水)란 '민족은 이념에 앞선다'라고 풀이해야 합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강준식 상임이사가 나에게 힘주어 하는 말이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강대국이 가져다 준 이념에 얽매어 살아왔다. 내 핏줄끼리 만나기는커녕 서로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 제삼국에서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것조차도 죄가 되었던, 동물보다 못한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

한 작가의 소년시절 회상


소설가 전상국 선생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 '내가 겪은 6·25 전쟁'에서 소년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열 살 나이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나기 몇 달 전으로 기억한다. 읍내 경찰서 뒷마당에 잡아다 놓았다는 '빨갱이'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경찰서 담벼락에 매달렸다. 어른들이 말하는 빨갱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날 경찰서 뒷마당에 포승에 묶인 채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남자 어른을 보았을 뿐이다. 더 맥빠지는 일은 그 빨갱이 속에 우리 이웃집 아저씨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해방둥이로 태어난 나도 어렸을 때부터 반공교육을 받아왔으며 자랐다. 중공군이나 북한군 병사를 흉악무도한 도깨비로 각인한 채 50년을 더 살았다.

그러다가 1999년 여름 항일유적지 답사차 중국에 가 중공군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다녔는데, 녹두색 제복을 입은 '왕빙'이라는 하사관과 여러 날 같이 지내고는 그를 적대시했던 내 선입관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내 조카나 아들처럼 조그마한 일에도 얼굴을 붉히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평양에서 만난 사람

 김병훈 위원장(왼쪽)
김병훈 위원장(왼쪽)박도

2005년 7월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항대합실에서 "선생님, 반갑습네다"하고서는 손을 내민 동포의 손을 잡자 까칠한 게 마치 농사꾼 외삼촌 같은 질박함에 괜스레 미리 가진 적대감이 부끄러웠다.

2005년 7월 22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백두산을 가고자 순안공항을 가는 버스에 옆자리에 나이 지긋한 북한 작가가 앉았다.

그 분은 당신을 조선작가동맹 김병훈 위원장이라 소개하면서 내게 이름과 고향을 물었다. 마침 목에 걸고 있는 명패를 보이면서 고향이 '경북 구미'라고 말하자, 당신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철도원으로 경북 김천역에서 근무했다면서 어린 시절 얘기를 했다.

당신은 어릴 때 거의 날마다 김천역 석탄 하차장에서 놀았기에 검둥이로 지냈다는 말씀을 하기에, 나도 외가와 고모 댁이 김천이라 석탄하차장을 잘 안다고 하니까 고향사람을 만난 듯이 매우 반겨 맞아주셨다. 내가 구미 출신인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에 관하여 묻자, 당신 초기 작품 주제가 만주 벌판의 항일 전사였다고 하면서, 허 장군의 생애를 환히 꿰뚫고 있었다.

사람은 만나야 한다. 분단된 동족끼리는 통일의 그날까지 더 자주 만나야 한다. 사실 우리 겨레가 언제 이념의 노예로 서로 적대시하며 지냈는가. 어리석은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고자 본의 아니게 이념의 노예가 된 탓도 있으리라.

서로 '미제 원쑤' '악의 축'으로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을 듯하던 북-미 간에 아름다운 선율로 그동안 쌓인 응어리를 푸는 이즈음에, 우리도 남북의 문화 예술인들이 누구보다 먼저 만남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는 게 역사와 후손에 죄를 짓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화해와 용서보다 더 좋은 미덕은 없다"고 한다. 마침 오늘(27일) 저녁 보도를 보니까 <통일은 없다>라는 책을 쓴 반통일적 장관 내정자가 백성들의 따가운 여론에 낙마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그 언젠가 통일이 된 먼 훗날, 반통일 정치가나 역사의 정의를 거스른 학자 예술가들은 고개도 들지 못할 것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리랑' 연주를 다시 들으며, 언젠가 철조망이 걷힌 휴전선 통일 마당에서 남북 동포들이 두둥실 춤을 출 그날의 감동을 미리 그려본다.

남과 북,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는 하나다.

 일본 조선대학교 오향숙 선생(왼쪽)과 공지영 작가 의 만남, 오향숙 선생이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에다가 '강경애 문학비'를 세울 때 공지영 작가가 많은 기부금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 인사 자리였다
일본 조선대학교 오향숙 선생(왼쪽)과 공지영 작가 의 만남, 오향숙 선생이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에다가 '강경애 문학비'를 세울 때 공지영 작가가 많은 기부금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 인사 자리였다 박도

 홍석중 작가(왼쪽)와 상명대 강영주 교수. 홍명희 연구의 대가인 강 교수가 홍명희 선생의 손자 홍석중씨와 반갑게 만났다.
홍석중 작가(왼쪽)와 상명대 강영주 교수. 홍명희 연구의 대가인 강 교수가 홍명희 선생의 손자 홍석중씨와 반갑게 만났다. 박도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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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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