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이다. 불꽃 튀는 경쟁이 벌어졌던 자리가 비어있다. 크게만 보이던 품계석이 작아졌다. 신하들이 관직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이정근
이제는 서로 가지 않으려 한다.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자취를 감췄다. 땅은 똑같은 땅인데 왜 이럴까? 명나라는 세세손손 숭배해야 하는 나라였고 청나라는 배척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륙은 이제 환상의 땅이 아니라 죽음의 땅이다. 한 번 가면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긴장된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돌발변수가 발생하면 모조리 처형될 수 도 있다. 대륙은 두려움의 땅이었다.
난항 끝에 호종 인원이 확정되었다. 가함대신(假銜大臣)에 남이웅, 대빈객 박황, 부빈객 박노, 무재(武宰) 박종일·이기축, 보덕 황일호, 겸보덕 채유후, 필선 조문수, 겸필선 이명웅, 문학 민응협, 겸문학 이시해, 사서 서상리, 겸사서 정뇌경, 설서 유계, 겸설서 이회, 익위에 서택리·양응함, 사어(司禦) 허억·김한일, 부솔(副率) 이간·정지호, 시직(侍直) 이헌국·성원, 세마(洗馬) 강문명, 사복시 주부 정이중, 선전관 위산보·변유·구오, 부장(部將) 민연, 의관에 정남수·유달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중에서 자청한 사람은 정뇌경과 강빈의 동생 강문명이었다.
이것이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의 씨앗이 될 줄이야 그 누구도 몰랐다. 세자의 품위 유지를 위하여 상당한 인원이 배치되었다. 관직을 명받은 관리들을 받쳐줄 하인들까지 합하면 193명에 이른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정(父情)이 골골이 스며있다.
정치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행의 씨앗명분을 앞세운 인조의 인적구성을 청나라는 조선의 작은 조정으로 인식했다. 청나라의 정치문화는 조선과 다르다. 철군명령과 함께 도르곤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고 황제가 돌아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는 왕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세자에게 많은 결정을 요구했다.
세자는 고독했다. 심양에 도착한 소현은 국내 정치 여건상 재량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청나라 권부와 조선 조정의 역학관계에서 힘들어 했다. 사사건건 본국에 의탁하는 세자를 불신한 청나라의 압박 강도는 더해갔다. 조금이라도 재량권을 보이면 인조는 왕위를 위협하는 아들로 의심했다. 볼모와 세자. 그의 심양생활은 정신적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상암 들녘에 진을 치고 있던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국으로 철수다. 그들과 함께 소현세자도 움직였다. 도르곤이 앞서고 소현세자가 뒤따랐다. 그 뒤를 이어 강빈과 봉림대군이 따랐다.
도르곤을 따르는 수레에는 약탈한 금은보화가 가득 실려 있었으며 연실이가 타고 있었다. 용골대를 따르는 수레에도 짐 보따리가 실려 있었다. 조선인 여자도 함께 타고 있었다. 행렬의 후미를 따라가는 역관 정명수의 수레는 4대였다. 누가 채워주었는지 모르지만 귀중한 물건들이 그득그득했다. 조선인 여자 4명도 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수레에 올라앉아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