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 식사찰기 없는 밥 한 접시, 기니아 파울, 그리고 손 씻을 물 한 그릇.
차승만
식사로는 찰기 없는 쌀과 기니아 파울 수프, 그리고 생선 수프와 방쿠가 나왔다. 먼저 오른 손을 접시 물에 깨끗이 씻은 후 방쿠를 한주먹 떼어내서는 수프에 푹 적시면서 주물럭거린다. 그러는 사이 수프는 방쿠에 스며드는데, 이렇게 스프가 잘 밴 방쿠를 먹다 보면 한 그릇 가득하던 수프가 바닥을 보이며 금세 동이 난다.
기니아 파울을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보며 작은 체구에 먹는 양이 많아 보였는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무안해진 나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했다.
“저도 사실 얼마 전까지 3년 동안 채식을 했었어요.”
“정말입니까? 그래서 살이 찌지 않았나 봅니다!”
“하하. 살이 안 찐 것은 체질이지요. 채식을 너무 무계획적으로 해서 몸이 너무 약해져서 다시 육식을 하게 되었어요. 여태껏 채식을 했다면 오늘 이런 특이한 음식도 못 먹을 뻔했네요.”
“네. 하하. 존 로빈스가 가나에서 길러지는 소들과 기니아 파울을 보면 육식예찬론자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가 건강을 위해서만 채식을 했었다면 말입니다.”
다니엘이 재치 있는 농담으로 내 대답을 멋있게 받아넘겼다. 쿵짝 쿵짝 ‘뽕작’ 리듬을 닮은 가나 전통 노래에 나도 모르게 점심을 먹는 동안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박자를 타고 있었다. 나는 왜 이 빠른 리듬 위에서도 슬픔이 느껴지는 것일까?
오후 한낮의 여유로운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용히 계산을 끝내고 식당 문을 나서고 있는데 베네딕트가 자꾸 눈치 없이, 우리 계산서에 한 명이 잘못 추가되었다며 종업원과 실랑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윙크를 보내며 방금 전에 우리에게 말을 건 누더기 옷의 그 분을 가리켰다. 식당을 빠져나오길 한참이 지나자 베네딕트가 궁금증을 못 참았는지 말을 걸어왔다.
“이게 한국의 풍습인가요?”
“글쎄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많은 어르신들은 늘 말씀하셔요. 하늘을 혼자서 가질 수 없듯이 밥은 나누는 거라고요.”
“와우~! 기가 막힌 표현이군요! 어떤 사람이 그런 멋진 말을 했죠?”
“음… 그건… 예수!”
밥가를 노래한 시인의 이름을 말하려던 것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성경책에서 그런 표현은 못 봤어요! 미스터 차 이제 보니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사실 웃자고 던진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내게 이름 없는 모습으로 몸소 희생적인 나눔의 삶을 보여주셨던 분들이 나의 눈에는 이 땅을 다시 찾은 ‘예수님’으로 보였으니까.
“한국에도 구걸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 걸식자들을 도와줘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거지보다는 껌을 팔거나, 지하철역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한 줌 어치의 산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에게 마음이 더 가죠. 그런 분들에게선 돈을 더 주고서라도 꼭 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동냥이 아니라, 당당한 경제활동이잖아요. 저는 적선을 하는 게 아니죠. 아세요? 아크라 시내에서 비닐에 담긴 물을 얼마나 많이 사먹었는지? 제가 가나를 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지 알겠죠? 도로 한복판을 점령하다시피한 노점 인파를 보고 전 오히려 가나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