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의 어머니인 효빈 김씨.
KBS
그리고 그의 출생 시에 옥상에 백룡의 형상이 도사리고 있는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는 말도 있었지만, 경녕군은 자신의 ‘분수’를 비교적 잘 지킨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왕실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무역관계를 잘 해결하기도 하는 등, 그는 ‘시키는 일’을 잘해낸 그런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세종은 즉위 후에 형인 양녕대군을 보호하듯이 배다른 형제인 경녕군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일타홍이라는 기생과의 스캔들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은 바 있는 경녕군은 세종의 적극적인 비호가 없었다면 쉽게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이방원의 적자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었다.
경녕군, 정치적 야심이 없었을까?‘그럼, 경녕군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었던 게 아니냐?’며 이 논의의 결론을 내리려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급한 태도가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 싶게 만드는 중요한 자료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시호에 관한 <세조실록>의 기록이다.
경녕군이 죽은 해인 1458년의 일을 기록한 <세조실록> 세조 4년 9월 9일자 기사에서 그의 시호인 제간(齊簡)의 의미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시호를 제간이라 하였다. 마음을 다잡아(執心) 씩씩함을 자제하는 것을 제(齊)라 하고, 공경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물론 시호에는 가급적 좋은 표현을 넣는다. 하지만, 시호에는 망자에 대한 당대의 일반적 평가를 담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왕자의 시호를 정하면서 그 인물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이 도리어 현실적 상황에 배치되는 판단일 것이다.
경녕군의 시호인 제간에서 제(齊)라는 표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제’란 일반적으로 ‘가지런히 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경녕군의 시호를 제정하면서 ‘제’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마음을 다잡아 씩씩함을 자제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제’를 붙인다고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부분에 나타나는 경녕군의 이미지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자기의 분수를 잘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시호에서는 그와 다른 또 다른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씩씩함’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경녕군에게 시호를 부여한 사람들은 그가 강성(强性)의 인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강성은 ‘자제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자제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제1왕자가 아닌 왕자가 강성 기질을 표출해도 위험한데, 하물며 서자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호에 따르면 그는 그 일을 잘해냈다. 그가 마음을 다잡아 자신의 강성을 잘 자제했다는 것이 세조 당시 조선정부의 평가였다. 그런 일반적인 평가가 ‘제간’이라는 시호에 일정 정도 담겨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시호 하나를 갖고 지나친 확대해석을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위의 기록을 통해 경녕군도 양녕대군 못지않은 강성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기질이 후천적 노력에 의해 억제되었을 뿐이지, 그는 분명히 ‘자제될 필요가 있는 내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경녕군, 정치적 야심 품었을 가능성 있지만...‘자제될 필요가 있는 내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 왕자의 자리에 있었다면, 적자이든 서자이든 간에 자신의 처지에 관계없이 분명히 저 ‘청와대’를 향해 모종의 기대를 품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충녕대군 등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그는 단지 강한 인물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학문적 능력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한번쯤 야심을 품어봄직 했을 것이다. 만약 경녕군이 좀 더 빨리 태어났다면, 왕실의 권력지도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할 때,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은 강한 기질과 학문적 능력을 겸비했기 때문에 한번쯤 대권을 꿈꾸었을 봄직도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고 스스로를 잘 억제함으로써 왕실에서 신뢰를 얻은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도 분명히 ‘야심’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설령 있었다 해도 그것이 후천적 노력에 의해 잘 억제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극에서 경녕군을 묘사할 때에는, 자격과 능력을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구를 스스로 억제할 줄 아는, 그리고 그런 갈등과 번민 속에서 정신적 만족을 얻을 줄 아는 인격자의 이미지를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공유하기
<대왕세종> 경녕군,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을까?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