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는 옛날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사진을 통해 본 승보사찰 송광사의 어제와 오늘

등록 2008.03.07 14:59수정 2008.03.0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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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이를 안은 아저씨가 불일폭포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옛날 사진과 비교할 때 계류의 물이 확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안은 아저씨가 불일폭포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옛날 사진과 비교할 때 계류의 물이 확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 안병기


산 이름을 절 이름으로 바꾸어버린 송광사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에 있는 송광사는 불·법·승 3보 중 승보 사찰이다. 16국사를 배출시킨 이력이 '승보 사찰'이라는 명성을 낳게 된 것이다.


송광사란 이름은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계산의 옛 이름은 송광산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절의 종지(宗旨)인 조계를 산 이름으로, 산 이름은 절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신라 말 혜린선사가 창건할 당시는 길상사라 불렀으며, 고려 시대 보조국사 이후에는 수선사가 되었다가 조선시대 초에 이르러 비로소 송광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내가 처음 이 절에 간 것은 구산 스님(1909~1983)이 입적하신 다음해였다. 구산 스님은 여순 반란과 6·25로 잿더미가 된 송광사를 복구하는 데 온 힘을 쏟으신 분이다. '일 수좌'란 별명을 들을 만큼 부지런했다. 고은 시인(일초)·법정 등과 더불어 효봉 스님의 제자이기도 하다.

처음 갔을 적에, 당시 불일암에 계시던 법정 스님의 배려로 며칠 동안 송광사에서 묵게 되었다. 송광사의 이곳저곳을 살펴볼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당시엔 사찰 건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때라서 아무런 감흥도 얻지 못했다. 달리는 말 위에 앉아서 산을 바라보는 것은 가리켜 '주마간산'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말 위에 앉아 있지 않으면서도 지나치듯 산을 바라본 셈이니,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불일폭포

a  1960년대의 불일폭포 풍경. 송광사 우화각 아래 계류에 있는 이 폭포 위엔 징검다리가 있다.

1960년대의 불일폭포 풍경. 송광사 우화각 아래 계류에 있는 이 폭포 위엔 징검다리가 있다. ⓒ 송광사 성보박물관


송광사는 서쪽을 바라보며 조계산 기슭에 기대고 있다.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서 차를 내려 줄지어 선 상가를 지나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보면 무지개다리를 만난다. 다리 위에는 청량각이란 아담한 정자가 서 있다. 측백나무와 잡목숲을 지나 더 깊숙이 들어가면 작은 연못인 낙하담과 불일폭포에 닿게 된다.


일주문을 거쳐 곧장 경내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불일폭포와 그 근처에서 우화각 아래로 흘러오는 계류를 바라보며 한 박자 숨을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계절에 찍은 사진일까. 사진으로 보는 불일폭포는 현재와 달리 아주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폭포 위로 놓인 징검다리를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처녀들이 건너가고 있다. 적어도 장마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장마철이라면 계류를 건너가고자 벗어든 버선이나 고무신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불일폭포는 수량이 크게 줄어들어 폭포로서의 흥취는 맛보기 어렵다. 그래도 아이들이 팔짝팔짝 뛰어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것을 모습을 바라보거나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이 아이를 팔에 안고 기우뚱거리면서 건너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한 편의 시(詩)를 읽는 듯하다. 시가 별건가. 가슴을 울리면 그냥 시지.

a  1920년대 일주문의 모습괴 현재의 모습. 예전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데가 없는 모습이다.

1920년대 일주문의 모습괴 현재의 모습. 예전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데가 없는 모습이다. ⓒ 송광사 성보박물관 / 안병기


가던 길로 되돌아와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절의 입구인 일주문에 닿게 된다.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전면 1칸 크기로 지은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로로 달지 않고 중앙에 세로로 글씨를 쓴 현판이 약간 특이하다. 중앙에 대승선종, 우측에 조계산, 좌측에 송광사라고 나란히 3열로 썼다. 안에는 '승보종찰조계총림'이라 쓴 현판이 따로 달려 있다.

문과 담은 있지만, 문짝이 달리지 않은 것을 보면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려고 세운 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로 들어가니, 마음을 가다듬어라!"라는 뜻이다. 6·25 전란과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우화각과 천왕문

a  1920년대 사천왕문의 모습.

1920년대 사천왕문의 모습. ⓒ 송광사 성보박물관


a  현재의 사천왕문(좌). 능허교 위에 지은 우화각을 지나면 사천왕문으로 들어선다.

현재의 사천왕문(좌). 능허교 위에 지은 우화각을 지나면 사천왕문으로 들어선다. ⓒ 안병기


일주문으로 들어서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려면 계류에 가로놓인 능허교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다리 위에는 우화각이라는 18세기 초에 지은 건물이 서 있다.

우화(羽化)는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소동파가 쓴 '적벽가'에 나오는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이란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맑은 계곡물에 비친 누각의 그림자와 고목이 빚어내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잠시나마 속세의 땟국을 씻어 버리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다리를 건너가면, 곧바로 천왕문이 기다리고 있다. 너무 성급하게 마중을 나온 것이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절 영역이 시작된다. 조선후기의 건물인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천왕문 안에는 17세기에 진흙으로 빚은 소조 사천왕상이 봉안돼 있다.

잿더미가 되다시피한 송광사를 일으켜 세운 구산 스님

a  1940년대 송광사 전경. 19c 초에 일어난 화재로 55동이 남았던 것을 순조 때 중건했다 하니,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을까. 지금보다 대웅전 앞마당의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송광사 전경. 19c 초에 일어난 화재로 55동이 남았던 것을 순조 때 중건했다 하니, 그 정도 규모가 아니었을까. 지금보다 대웅전 앞마당의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송광사 성보박물관


이윽고 절 마당에 서면, 전면에 웅대한 가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송광사는 조계산 줄기를 뒤에 두고 서쪽을 바라보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땅의 모양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풍수지리적 조건을 적절히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송광사의 가람 배치는 크게 다섯 군데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청량각에서부터 종고루까지 이어지는 진입 영역,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분산 배치된 법당 영역, 대웅보전 좌측에 있는 국제선원 영역, 대웅보전 좌측으로 모여 있는 요사채 영역, 대웅보전 뒤편의 국사전을 비롯한 선방 영역 등. 특히 대웅보전 뒤 높은 석축 위에 국사전·수선사·설법전·삼일암·하사당 등이 자리 잡은 것은 송광사가 수행하는 스님 위주로 건축된 절집이라는 걸 말해준다.

여순 반란과 6·25로 잿더미가 되다시피한 송광사를 일으켜 세운 분은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초대 방장으로 추대된 구산 스님이다. 가는 곳마다 절을 짓고 고치면서 가람 수호에 힘썼다. 스님이 입적하신 후에는 주지 현호 스님이 중임을 맡아 불사를 계속했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선 전각 수만 해도 70여 동에 이른다고 한다.

오늘날의 송광사가 있기까지 힘을 보탠 스님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러나 특별히 지난 1986년에 입적하신 인암 스님(1908~1986)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열여덟 살에 송광사에 들어와 전란으로 소실된 사람의 복구를 위해 직접 벽돌을 쌓으면서 불사에 참여했다는 말을 스님에게서 직접 들은 바 있다.

공비가 지른 불 때문에 소실돼버린 옛 대웅전

a  1930년대 대웅전의 모습.

1930년대 대웅전의 모습. ⓒ 송광사 성보박물관


a  승보전이 돼 있는 옛 대웅전. 1961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승보전이 돼 있는 옛 대웅전. 1961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 안병기


송광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전각인 대웅보전은 1988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목수 신영훈 선생이 건축을 총괄했다. 그 이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현재의 승보전이다.

사진으로 보는 건물은 1930년대에 찍은 대웅전이다. 뒤를 이어 대웅전으로 사용됐던 승보전보다 기둥도 훨씬 높아 보이고 당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51년 5월 10일, 공비들이 지른 불로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모두 20동이나 되는 건물이 소실됐다고 한다. 현재 승보전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961년에 새로 지어 대웅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1988년, 새 대웅전을 짓고 난 후 원형 그대로 현재의 위치에 옮기고 승보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승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는 4분합 빗살문을 달았으며 외벽에는 심우도를 그려넣음으로써 송광사의 '목우(牧牛)' 가풍을 표현하였다.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10대 제자, 십육나한과 1250 비구를 봉안하여 석가모니의 영산회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꽉 채운 전각보다는 적당한 공허감이 나을 것을

a  1930년대 낙하담과 수석정.

1930년대 낙하담과 수석정. ⓒ 송광사 성보박물관


a  현재의 낙하담. 이곳엔 해마다 초파일 무렵이면 오색연등이 풍선처럼 걸려 있다.

현재의 낙하담. 이곳엔 해마다 초파일 무렵이면 오색연등이 풍선처럼 걸려 있다. ⓒ 안병기


송광사의 옛 사진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사진 가운데 하나가 호수에서 배를 젓는 풍경이다. 1930년대 수석정(水石亭)과 그 주위 호수 모습이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송광사 가기 직전에 만나게 되는 다송원이라는 찻집 옆 계곡에 있는 낙하담이 그 자리다.

계류를 막아서 만든 낙하담(落霞潭)의 수면은 아주 고요하다. 하늘을 한가로이 흘러가는 구름과 그려내는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마음의 평화가 깃든다. 2000년부터 임경당·해청당·월조헌·취정루 등의 건물을 대대적으로 해체 보수하면서 수석정도 새로 지었다.

지금의 송광사는 전각 수가 너무 많다. 어디서부터 봐야 할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한때 이곳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승려생활을 했던 고은 시인은 1987년에 낸 <절을 찾아서>라는 문화기행집에서 송광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송광사는 절만으로 너무 크다. 아무리 큰 절이라도 스님이 없으면 큰 절이 되지 못한다. 그것도 수행이 깊은 스님이 있어야 한다. 구산당 이외의 수좌 몇 분을 제외하면 삼일암 하나로 요약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큰 절이 텅 비어 있을 때 그 절에 있어야 할 중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을 때의 공허감이 차라리 적멸법(寂滅法)인지 모른다. 며칠 동안 있지 못하고 나는 청심문을 떠났다." (고은 <절을 찾아서> 255쪽)

여기서 구산당이란 자신의 사형이었던 구산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글 속엔 구산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들어 있다. 구산 스님이 1983년에 입적하셨으니, 그 이전에 찾아간 것이다. 24∼5년 전에도 "지금도 송광사는 절만으로 너무 크다"라고 했으니,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이제 곧 송광사에도 봄이 올 것이다. 그리고 효봉영각 담벼락 커다란 산수유도 노란 꽃을 피워낼 것이다. 산수유 꽃 피듯 송광사 스님들의 얼굴에 화두꽃이 만발하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기사 속 흑백 사진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판매하는 사진 엽서를 디카로 직접 찍어 트리밍한 것으로 원 사진엽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진엽서는 송광사의 허락을 얻어 사용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 속 흑백 사진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판매하는 사진 엽서를 디카로 직접 찍어 트리밍한 것으로 원 사진엽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진엽서는 송광사의 허락을 얻어 사용했습니다.
#송광사 #승보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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