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홍반장>. 주인공인 홍 반장은 주제넘음을 무릅쓰고 동네 대소사에 두루두루 관여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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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반장(김주혁 분)은 동네 청소는 물론이고 각종 수리·수선도 죄다 도맡아 한다. 중국집 종업원이 자리를 비우면 ‘철가방’을 대신 배달해주고 편의점 종업원이 자리를 비우면 카운트를 대신 책임져주고, 라이브 카페의 가수가 몸이 아파 결석하면 대신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이처럼 동네 대소사에 안 끼는 데가 없는 홍 반장을 보면서 당혹과 매력을 함께 느끼는 노처녀 치과의사 윤혜진(엄정화 분)처럼, 왕실은 물론이고 조정의 대소사에 안 끼는 데가 없는 ‘중세판 홍 반장’을 보면서 시청자들 역시 윤혜진과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지 모른다.
<대왕세종> 속의 충녕대군이 관여하려고 시도하는 국사(國事)의 범위는 실로 전(全)방위적이다. 왕도 세자도 아닌, 조용히 숨죽여 살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어쩌면 파리 목숨보다도 더 못하다 할 제3왕자인 그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대일관계·대명관계에까지 개입하려 한다. 누가 보아도 그런 행동들은 세자 자리를 노리지 않고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또 충녕은 큰아버지의 애첩인 초궁장과의 연애행각이 탄로나 위기에 빠진 세자 이제를 도우려고 정종에 대한 설득 작업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런 충녕의 모습을 보면서 상왕 정종이 내뱉은 한 마디. “충녕, 너는 참으로 영악한 놈이다!”(3월 2일 18회 방영분)
이처럼 상왕 정종은 물론이고 어머니 원경왕후를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요시찰 대상자’로 지목되고 있는 충녕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언제나 “오브 더 피플”(백성의), “바이 더 피플”(백성에 의한), “포 더 피플”(백성을 위한)을 입에 달고 산다.
백성을 사랑하는 그 따스한 마음에 이따금씩 가슴이 뭉클할 때도 있지만, ‘저 분, 저러고도 무사하실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감출 수 없는 때도 있다. 어찌 보면 세자보다도 더 조심성 없고 더 적극적인 제3왕자가 무사히 ‘명줄’을 보존하며 백주대낮에 활보하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그저 한없이 경이롭기만 할 뿐이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에서 살았을 실제 충녕
그러나 충녕의 즉위 이전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태종실록>을 살펴보면, 실제의 충녕이 얼마나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과연 <대왕세종>에서와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을지는 좀 더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실제의 충녕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인물이었다. 그는 외삼촌인 민무구·민무질 등의 견제 때문에 한때 생명의 위협마저 느껴야 했다. 또 그 이전인 태종 즉위년(1400)엔 김과라는 인물이 이제 겨우 네 살 밖에 안 된 왕자 이도(훗날의 충녕군)를 두고 “이 작은 왕자가 장(長)을 다투는 마음이 있다”는 말을 하여 태종을 불쾌하게 한 적도 있다. 네 살짜리 왕자의 행동을 보고서 김과가 그런 걱정을 품은 모양이다. 그만큼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훗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왕자들 간의 반목이 항상 걱정거리였다고 볼 수 있다.
세자 아닌 왕자들에 대한 조정의 견제와 경계심이 이 정도였기 때문에, 태종은 제2왕자인 효령은 물론이고 제3왕자인 충녕을 보호하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이들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곤 하였다.
“이 아이들은 장차 세자에게 기식(寄食)할 것이다.”(1409년)
“군왕의 자식들은 맏아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다 죽여야 하느냐?”(1413년)
특히 1413년 발언 때에는 태종이 신하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에게는 자식들 간의 반목도 두려웠고 제2·제3왕자들의 안위 역시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태종은 툭하면 자식들을 불러놓고 형제간의 우의를 강조하곤 했다. 예컨대 태종 9년(1409)에는 여러 왕자들을 불러놓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형제간 우의를 강조했다. 잔혹한 군주인 태종 이방원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형제간 우의를 강조했다면, 그가 왕자들 사이의 반목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충녕, 너는 참으로 영악한 놈"태종 13년 12월 30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부자가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충녕대군이 아버지에게 시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그것이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여느 아버지 같았으면 그 순간에 “충녕, 너 참 똑똑하구나”라며 “네 재능을 살려봐”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태종은 ‘불행의 씨앗’을 생각했다. 자칫 충녕을 칭찬했다가 이것이 훗날 어떤 불행의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충녕을 외면한 채 세자 이제를 돌아보면서 한마디 했다.
“장차 너를 도와 큰일을 도모할 아이다.”
그 말 한마디로 태종은 충녕대군이 자칫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동시에 세자 이제가 둘째 동생을 시기하지 않도록 다독이는 이중적 효과를 의도한 것이다. 충녕이 자랑스럽고 또 칭찬하고 싶은 그 마음이야 굴뚝같았겠지만, 그는 결코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셋째 아들이 너무 똑똑해지면 불행하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태종은 똑똑한 충녕이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그저 평안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