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 선생 생가 대문
박도
나는 곧장 버스터미널 택시정류장에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젊은 기사였다. 그에게 매천 생가에 가지고 하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리더니 뒤에서 대기 중인 기사에게 물어 가는 길을 알아 와서는 그제야 출발했다.
다른 지방 기사도 아닌 제 고장 광양 기사가 매천생가도 모르다니. 기사는 매천이 누구냐고 반문하기에, 내가 그분의 생애를 일러주자 미처 알지 못했다고 사죄했다.
이런 세상이고 보니, 밥술이나 먹는 이는 자식에게 제 나라 말보다 남의 나라 말을 먼저 가르치고자 태평양을 건너가고, 지도급 인사조차도 제 나라 맞춤법도 모른 채, 공교육마저도 영어로 하자는 한심한 발상을 하는데도, 백성들은 그저 잘 살게 해준다는 말에 춤을 추며 하루 빨리 부자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기사에게 왕복 차삯과 대기료를 주기로 하고, 먼저 생가를 둘러보고는 거기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매천사당을 가자고 하였더니, 그는 그곳에 매천 사당이 없다고 우겼다. 나는 미리 입수한 사적지 지도를 보고 가는 데도 말이다. 마침 생가 들머리에 사당가는 길 표지판이 나오자 그제야 기사는 차를 그쪽으로 몰았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구먼요."그는 자기 고장 출신의 매천을 몰랐던 게 겸연쩍은 양 거듭 사과했다. 얼마나 잘 먹고 살아야 백성들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질까? 사실 이즈음에는 최저 생계비 보장으로 굶는 이는 거의 없고, 20~30년 전에 견주면 거의 집집마다 차를 굴리면서 모두 부자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기갈이 든 사람들처럼 도시나 시골이나 온통 돈 돈 돈이요, 경제 경제 경제타령이다. 우선 당장 잘 살게 해준다면 산도 뭉개버리고 강줄기도 바꿔도 좋다. 후손들은 바다에 잠겨도, 기름 뜬 물을 먹어도 그저 오늘만 잘 살면 그만이다. 하루 빨리 부자 되어 태평양을 건너면 그만 아닌가. 도덕 양심이 밥 먹여 주나. 지도급 인사 좀 보시오. 그들 가운데 도덕과 양심을 지키며 바로 산 이가 몇이나 되나?
남(일본)은 수십만 동병(動兵)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 제 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하게 살 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하는 것이여. 태평천하! ……- 채만식 <태평천하>일본에 유학 간 손자의 피검 소식에 짐승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는 윤직영 영감이 소설 속에서만 있는 인물 같지 않다.
아무도 살지 않는 어딘가 썰렁한 생가와 굳게 닫힌 사당을 멀찍이서 바라본 뒤,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기왕이면 매천 선생이 글을 쓰시다가 돌아가신 구례에다 숙소를 정하고자 곧장 순천행 버스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