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쇼크 이후 최대의 위기가 오는 것 같다.", "위기가 시작에 불과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잇따라 '경제 위기'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유가·곡물 등 원자재 가격 급등과 금융시장 불안으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조짐, 국내 물가 상승 등에 철저히 대응하라는 내각을 향한 독려치고는 수위를 벗어났다.
"금융위기 국면이 당분간 이어질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통제 가능한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전광우 금융위원장의 진단과도 한참 괴리가 있다.
게다가 '위기다'라는 경보만 되풀이할 뿐 '대책'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 경제팀이 경제 안정보다 무리한 성장 목표에 매달리면서 환율 폭등을 불러왔다. '시장 경쟁'을 강조하면서 '50개 생필품 물가관리'를 하겠다는 등 혼란스러운 정책을 남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대통령이 국민과 경제 주체들의 위기감만 증폭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경제 주체의 불안심리가 지나치면 경기 회복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이명박 대통령이 연일 '위기 타령'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통령이 연일 '위기 타령' 하는 까닭은?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그 이유를 짐작케 하는 발언을 했다. 이한구 의장은 19일 최근 경제 위기에 따른 대책과 관련, "노무현 정권이 다 망쳐놔서 쓸 것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의 경제 위기가 '노무현 정부 탓'이라는 말이다.
이 대통령이 위기를 강조하는 것이나, 집권여당이 '노무현 탓'을 들고나온 것은 4.9 총선을 앞두고 여당의 안정의석 확보를 호소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었던 '참여정부 심판론'을 되살려 보겠다는 것이다.
선거는 흔히 '구도가 승부의 8할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탄핵 역풍'이 불었던 2004년 17대 총선을 제외하고, 지난 몇 년 간의 각종 선거를 지배했던 유일한 구도는 '노무현 정권 심판론'이었다. 지난 대선 역시 이 구도로 압승한 한나라당은 4개월 간격을 두고 치러지는 18대 총선에서도 그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길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심판론'은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새 정권 견제론'이 채우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일제히 하향 곡선을 긋기 시작했고, 이른바 "새 정부의 오만함을 심판해야 한다"는 논리가 새로운 구도로 형성되는 추세다.
'어륀지'로 상징되는 인수위 시절의 설익은 정책, '고소영' '강부자'로 불리는 특정 계층.지역 편중 인사, 3명의 장관 후보자가 줄사퇴한 내각 인사 파동, 오기 인사 강행 등은 막 출범한 새 정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여기에 한나라당 공천 갈등은 전통적 지지기반을 두동강 내면서 한때 200석을 목표했던 한나라당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미 야당과 무소속 후보들은 이번 총선을 새 정부의 실책과 중심 공약에 대한 심판의 장으로 몰아간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경부운하 전도사'인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을 지목해 출마를 선언한 것이나, 공천 탈락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한 김무성 의원이 "탈당 의원들과 공동으로 대운하 반대 공약을 할 것"이라고 선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구 정권인사 사퇴' 카드로 '참여정부 심판론' 재현?
이에 당황한 한나라당이 꺼내든 카드가 '구 정권인사 사퇴론'이다. "'코드'가 맞지 않으면 같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앞세워 참여정부 시절 임명된 정부산하 기관장들에 대한 '축출'에 나선 것이다. 결국 '참여정부 심판론'의 재판인 셈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새 정부 심판론' 앞에선 무기력했다. 오히려 '역풍'이 불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현 경제 위기는 노무현 탓'이라는 구호를 들고 나섰다. '반 노무현 정서' 재확산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이한구 의장은 19일 mbn '정운갑의 Q&A'에 출연, "노무현 정권이 너무 망쳐놔 금리인상 갖고 물가 잡는 것이 힘들고, 재정적자가 크고 세출을 폐쇄해 놔서 감세로 경기 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쓸 수 있는 정책수단을 노무현 정권이 다 뺏어버렸다(<연합뉴스>와의 인터뷰)"는 것이다. 이 의장은 또 "이명박 대통령이 각 부처를 순시하면서 좌파 10년동안 못박아놨던 것을 어떻게 바꿀까 점검하고 있다"며 "정부 구조를 줄이고 스타일도 기업으로 바꾸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0일부터 진행중인 부처 업무보고에서 연일 공직사회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지난 17일 경북 구미산업단지에서 열린 지식경제부 업무보고에서는 "미리 이런(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상황에 대비해서 대책을 세우고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했는데 과거 부처 이름만 산업자원부였지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국가경제에 큰 죄를 지은 것이고,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측은 나중에 이 발언이 가져올 파장을 의식한 듯, 'e-춘추관'(기자들을 위해 보도자료를 올려두는 사이트)에 올려진 이 대통령의 발언 중 이 부분만 삭제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외교통상부, 노동부, 행정안전부 등에서도 빼놓지 않고 공직자들을 다그쳤지만, 경제 관련부처에서 특히 강도 높은 질책을 쏟아냈다. 이 대통령의 '경제 위기' 발언도 주로 그 때 이뤄졌다.
참여정부 관계자 "시간 지나면 옛날 탓도 못할 것"
특히 지난 16일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이 대통령은 "지나간 10년이 좋으면 한 번 정도 위기 온다고 생각한다"며 "그 때를 대비해서 경쟁력을 잘 갖췄었으면 좋았는데, 사실 우리가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현 경제 위기가 결국 전 정권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됐다는 지적인 셈이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의 '경제 위기는 노무현 탓' 논리와 맥을 같이 한다.
19일 상공의 날 기념식에서도 "최근 5년간 우리의 성장률은 세계 평균 4.9%에도 못 미치는 4.3%로 주저앉았다"며 "당장 수출호황만 믿고 다가올 위기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역시 경제 위기 책임을 참여정부에 전가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이즈음에서 정치적 안정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시절에는 무엇보다 정치적 안정이 굉장히 필요하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정치적 안정'은 집권여당의 과반 의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야당의 반발을 샀다.
우상호 통합민주당 대변인은 "민생을 챙기라니까 여당만 챙기고 총선에만 몰입하는 이러한 태도는 경제대통령을 표방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라고 할 수가 없다"며 "왜 경제대통령을 포기하고 선거대통령, 정치대통령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느냐"고 꼬집었다. 우 대변인은 또 "대통령께서 만약 이런 행보를 계속 반복한다면 야당은 그에 따르는 응분의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백히 밝힌다"고 경고했다.
참여정부 시절 경제정책을 담당했던 한 인사는 "(이명박 정부가) 지금은 옛날 탓을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옛날 탓도 못할 것"이라면서도 "취임 한 달밖에 되지 않아서 국정 운영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정권에 대해 직접 대응하는 것은 당분간 자제하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을 아꼈다.
경제위기론이 '총선 전략' 아니냐는 야당의 주장에 대해 청와대는 "정치공세"라고 일축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극복해야 할 국가 현안을 놓고 정파 간 공방을 벌이는 것은 후진적 행태"라고 반박했다.
이 대변인은 "일각에서 위기론을 정치에 이용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들을 오도하는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국민을 보고 뚜벅뚜벅 갈 것이다. 총선을 의식해서 무슨 정책을 내거나 아니면 총선을 의식해서 공약(空約)을 내는 일은 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유권자들이 오는 총선에서 지난 대선을 지배했던 '노무현 정부 책임론'과 새 정부 출범 1개월 만에 부상하고 있는 '새 정부 견제론' 중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향후 정국 향방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2008.03.20 15:26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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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외치는 이명박... 총선용 '노무현 심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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