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칠웅도
우광환
이런 가운데 기원전 353년에 벌어진 제나라와 위나라의 ‘계릉전투’는 중원쟁탈전의 관건이 되는 한판 승부였다. 당시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는 위나라였다. 그러나 사방에서 적이 협공하는 바람에 위나라의 국력은 몹시 피폐해져 있었다.
위나라 혜왕은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나라를 공격한 다음 한, 진, 제, 삼국과 연계하고자 하는 책략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아 당장 조나라와 가까이 지내던 제나라가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위나라와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었다.
조나라를 돕자고 결정을 내린 제나라 조정에서는 당연히 군사들을 조나라로 파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어전회의 말석에 앉아있던 손빈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조나라를 돕는다는 대의명분이 걸린 이런 기회에 제나라의 이익 또한 버릴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위나라는 조나라를 치기 위해 대병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위나라 본국엔 늙은 병사들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위나라를 치면 힘 들이지 않고 여러 성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다급해진 위나라 군사들도 조나라에서 철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조나라 또한 우리 제나라에게 고마워 할 것입니다.”이를 후세의 군사학에서는 위위구조(圍魏救趙,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를 친다.)라고 하여 남을 도와주면서도 내 이익을 취한다는 대표적인 전략으로 여기고 있다.
어쨌거나 전쟁터가 된 위나라의 계릉 땅에서 만난 방연이 보니 제나라 군사들은 전도팔문진(顚倒八門陣)이라는 진법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장사진(長蛇陣)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전날에 손빈으로부터 주워들었던 방연은 거리낌 없이 그렇게 변할 것에 대비하여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군영에서 내려다보던 손빈의 미소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나라 군사들은 방연의 위나라 군대를 원진(圓陣)으로 둘러싸버려 위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그 때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가던 방연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내가 그 다리병신 놈의 계책에 말려들고 말았구나!”그 후 십여 년이 흘러 제나라의 위왕이 죽고 그 아들 선왕이 즉위했다. 계릉전투 이후에도 위나라는 한나라와 진나라 등에 끝없는 공격을 받아 매년 전쟁 없이 지나는 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위나라 백성과 군인이 지치고 국가의 창고는 바닥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수세에 몰린 위나라는 당장 이 어려운 사태를 타개할 묘안을 짜내야 했다. 아직은 그래도 위나라는 강국이었다. 그렇게 엄밀히 계산을 해보니 위 혜왕이 보기에 한나라는 그나마 다른 강국들에 비해 좀 만만해 보였다.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기원전 340년, 방연으로 하여금 한나라를 치게 했다. 이미 조나라와 진나라에게는 많은 뇌물을 써서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터였다. 이토록 전국시대엔 내편 네편이 따로 없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또 그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어 급박하게 돌아갔다.
다급해진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 궁궐에서는 연일 회의가 열렸다. 제나라 군신들이 이 문제를 놓고 한바탕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대장군 전기가 한시라도 빨리 구원에 나서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빈이 머리를 흔들었다.
손빈은 한나라를 구원하는 것엔 동의하지만 빨리 구원에 나서지는 말고 상황을 봐 가며 천천히 구원에 나서자고 주장했다. 손빈이 제나라의 선왕과 대신 앞에서 말했다.
“한과 위가 전쟁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 두 나라의 손상이 크지 않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당장 구원에 나서면 우리 제나라는 한나라를 대신해서 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더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한나라의 지휘를 받는 꼴이 됩니다. 또 구원에 나서지 않으면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그 여세를 몰아 틀림없이 우리 제나라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나라가 오래도록 싸우게 놔두었다가 양 쪽 모두 힘이 빠졌을 때 나서는 편이 현명합니다.”손빈은 이 때 사냥꾼이 화살 하나로 두 마리 호랑이를 한꺼번에 잡은 고사를 인용했다. 숲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얽혀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한 사냥꾼이 화살을 꺼내들자 친구가 옆에서 말렸다.
“놔두게. 어차피 저 두 마리 중 하나는 싸움이 끝날 즈음이면 죽게 될 걸세. 게다가 싸움에 이긴 호랑이라도 이미 지치고 상처투성이 될 것이 아닌가. 그 때 그 놈을 쏴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네. 그러나 지금 화살을 쏘면 두 마리 모두 우리에게 달려들어 오히려 우리가 위험해 지네.”다시 말해 손빈은 한나라가 거의 다 죽게 되었을 때, 기회를 봐서 이번에도 위나라 수도인 대량으로 밀고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면 틀림없이 위나라의 군사들은 전처럼 회군하지 않을 재간이 없는데다가 이미 그들도 힘이 빠져 있을 것이기에 이 전쟁은 손쉬운 전쟁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손빈의 그 말을 듣고 좌중 사람들은 무릎을 쳤다.
손빈의 계책대로 얼마간 기다린 제나라 군사들이 때가 무르익었을 무렵 드디어 위나라로 휘몰아 들어갔다. 그러자 놀란 위나라 혜왕이 방연을 불러들여 태자에게 상장군을 봉하고 방연을 사령관에 임명하여 제나라 군사를 막게 했다.
위나라 왕은 사사건건 뒷덜미를 잡아채는 제나라와 이번엔 아예 사생결단을 내기로 작심했다. 그러다보니 한나라와 싸우다가 지친 것 같았던 위나라 군사들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대장군 전기가 그 모습을 보고는 겁에 질려하자 옆에 있던 군사 손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저 싸움이란 용맹으로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싸울 줄 아는 자는 전세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만들 줄 아는 자입니다.”그 날부터 손빈은 위나라 군사들의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후퇴하는 것처럼 꾸며 제나라 군사들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게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처음엔 야영지의 밥 짓는 화덕 십만 개를 만들라고 하더니, 다음 날은 반으로 줄이고, 또 그 다음날은 삼만으로 줄이게 했다.
그러자 뒤 쫓던 방연이 제나라 군사들의 밥 짓는 화덕 수가 단 삼일 만에 십만에서 삼만으로 줄어든 것을 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제 아무리 귀신같은 손빈 놈이라도 겁먹고 패주하는 군사들의 탈영을 막을 수는 없나보군. 단 삼일 만에 제나라 군사들이 이토록 많이 도망가 버릴 줄이야.”그날부터 방연은 더욱 군사들을 재촉하여 손빈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한나라와 싸우다 돌아온 위나라 군사들이 더욱 지치게 되었고, 보다 못한 상장군인 위나라 태자가 주의를 주었다.
“군사들이 너무 지치면 전투에 좋을 것이 없소. 어차피 그들은 우리 위나라 땅에 있으니 독 안에 든 쥐가 아니겠소.”그러나 방연은 듣지 않았다. 지난 날 계릉 땅에서 손빈에게 당했던 모욕을 어떻게든 빨리 갚아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방연은 중기병과 보병은 남겨둔 채, 행동이 빠른 경기병만을 이끌고 밤 낮 없이 제나라 군사들의 뒤를 쫓았다.
손빈은 그런 방연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방연의 위나라 군사들이 어느 날 어느 시각에 어디를 지날 것 까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손빈은 자기가 원하는 정확한 시간에 방연의 군대를 마릉(馬陵)이라는 고장의 산 속 깊숙이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마릉은 길이 좁고 지세가 험한 데다 나무가 무성하여 매복에 안성맞춤이었다. 손빈은 이곳의 길목에 나무를 베어 막은 다음 궁수 일만을 배치시켜 놓으며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정확히 오늘 밤에 이곳에 도착 할 것이다. 횃불이 켜지거든 그 횃불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아라.”방연이 한 밤중에 그곳에 도착하자 나무들이 쓰러져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는 군사들을 시켜 얼른 그것을 치우게 했다. 그러자 나무를 치우던 군사가 방연에게 와 보고하기를, 어떤 큰 나무가 껍질이 하얗게 벗겨졌는데, 거기 무언가 글씨가 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방연이 가까이 가보니 역시 벗겨진 나무에 글씨가 써져 있지만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가 않았다. 옆에 있는 군사에게 횃불을 밝히라고 하여 그 글씨를 읽으니 거기엔 놀랍게도 이런 글자가 있었다.
龐涓死此樹下 (방연사차수하, 방연이 이 나무아래서 죽다.)
그 글씨를 확인한 직후 사방에서 날아온 화살에 끝내 방연이 죽은 것은 물론, 그의 군사들마저 전멸하고 말았다. 이후 위나라 최고의 모략가라고 자타가 인정하던 방연이 없어진 위나라의 후속부대마저 제나라 군사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하고 말았다.
이 일을 두고 후세 사람들은 감조유적(減灶誘敵, 솥을 줄여 적을 속이다.)이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기세등등한 적의 힘을 역이용하여 승리한다는 의미로, 군사학의 중요한 전략방법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손빈은 조상인 손무의 병학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병서를 새롭게 써서 제나라 선왕에게 바치며 사직의 뜻을 밝혔다.
“이제 위로는 대왕의 숙원을 이루었고, 아래로는 신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엔 신이 배운 모든 것이 들어있으므로 신이 곁에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신에게 한적한 산이나 하나 주신다면 그 산에 들어가 고요히 일생을 마칠까 합니다.”제 선왕이 극구 말렸으나 손빈의 뜻을 꺾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제나라 석려산을 하사했다.
중국 춘추시대의 걸출한 군사 이론가인 손무의 후손으로 제나라에서 태어난 손빈이 활동하던 시기는 제나라 위왕과 선왕의 재위기간에 해당하는 기원전 356년~319년 무렵인 전국시대의 중반쯤으로 알려져 있다.
손빈 역시 직계 조상인 손무처럼 살아생전 군사모략가로 활동했고, 죽어서도 후세에 군사학에 대한 훌륭한 책을 남겼다. 그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손빈병법’은 한(漢)나라 시절엔 제손자(齊孫子, 제나라에서 활약했던 손빈이라는 뜻, 그의 조상인 손무는 오(吳)나라에서 활약했다)로 불렸고, 총 89편에 4권의 그림이 딸려있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후한시대 때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972년 중국 산동성 임기 은작산의 후한시대 무덤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안타깝게도 소실된 부분이 많지만 1만1천자를 확인할 수 있었고, 모두 30편으로 정리 되었다.
이 정도로도 ‘손빈병법’은 손무의 사상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좀 더 진전시키고 재창조하기까지 했다는 평을 듣는다. 연구자들에겐 ‘손빈병법’이 손무가 쓴 ‘손자병법’보다 전쟁의 법칙에 관한 이론에 더 심오하고, 진법과 전술에 관한 이론이 더 풍부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다.
그렇기에 ‘손빈병법’또한 ‘손자병법’과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 군사이론의 귀한 유산으로, 날이 갈수록 더욱 중요하게 연구되고 있다. 특히 그가 창안한 ‘삼사법’과 ‘감조유적’의 전략은 부분적 패배와 세의 불리함 속에서도 궁극적 승리로 이끄는 현대 군사학의 원리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지금도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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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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