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나의 주권'

18대 총선, 기권을 포기하고 투표소로 향한 이유

등록 2008.04.11 10:44수정 2008.04.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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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북구 강서을 투표소. 차분한 분위기 속에 투표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부산 북구 강서을 투표소. 차분한 분위기 속에 투표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입니다.조종안
부산 북구 강서을 투표소. 차분한 분위기 속에 투표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 조종안

 

9일 치른 제18대 총선은 예상했던 대로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한나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차떼기를 연상시키는 '봉투떼기'가 성행하고, 총선공약에서 슬그머니 빼버린 대운하 계획문서가 공개됐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한 수구언론의 공이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정신에 의해 행해지는 선거 투표권을 부여받은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권리행사를 해왔지만, 18대 총선에서는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지난 2004년 17대 총선 때 선택했던 민주노동당이 둘로 갈라져 어디를 선택할지 헷갈렸고, 후보 역시 찍을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투표를 하려면 30분 가까이 걸어가야 하고, 아침부터 날씨가 궂었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뉴스를 검색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찍었'읍'니까? 오늘 총선이 대선보다 중요한 이유... 기권한 사람, 불평도 말라'로 시작하는 <오마이뉴스> 강인규 기자님의 기사가 제 가슴을 뜨끔하게 했습니다. 꼭 저에게 묻는 말 같아서였지요. 

 

'그동안의 조롱, 표로 완성하자'... 절규에 가까운 투표 권유 

 

"우리는 지난 두 달간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열심히 비판하고 조롱했다. 그 가운데 '어륀지'를 머리에 쓴 전 인수위원장도 등장했고, '운하철도 999'와 '삽질 쥐'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기발랄함도 표를 통한 심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비판적인 국민여론과 상관 없이 전국의 많은 학교들이 사실상 몰입교육을 시작했고, 운하계획 역시 수면 아래에서 차근히 진행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정치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재기발랄한 조롱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더 낡은 방식, 즉 기표소에서 투표행위를 통해 조롱을 완성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그동안의 조롱, 표로 완성하자'라며 투표를 독려하는 대목은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정치인들은 일상적인 조롱보다 기표소에서의 투표행위를 더 두려워한다는 내용은, 총선 과정을 건너 동네 불구경하듯 관전이나 해야겠다던 제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했고요.

 

또 하나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장모님의 전화였습니다. 비도 내리고 하니까 심심해서 사위에게 전화를 하셨던 모양인데,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 어느 당을 찍어야 하는지 이것저것 묻는 말씀 속에는 투표 하고 놀러도 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투표소가 장모님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있거든요.

 

잃을 뻔했던 권리를 행사하다

 

 통합민주당 정진우, 한나라당 허태열, 진보신당 박양수, 평화통일가정당 박말식 후보가 출마한 부산 북구강서을 선거구 투표장 가는 길은 너무도 한가했습니다.
통합민주당 정진우, 한나라당 허태열, 진보신당 박양수, 평화통일가정당 박말식 후보가 출마한 부산 북구강서을 선거구 투표장 가는 길은 너무도 한가했습니다. 조종안
통합민주당 정진우, 한나라당 허태열, 진보신당 박양수, 평화통일가정당 박말식 후보가 출마한 부산 북구강서을 선거구 투표장 가는 길은 너무도 한가했습니다. ⓒ 조종안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라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비바람에 떨어져 뒹구는 꽃잎들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심호흡을 하며 걷는데, 세차게 불던 바람과 굵은 빗줄기가 멈추더군요.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가는 사람처럼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모두들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지, 관광을 갔는지 도로가 설연휴 때처럼 한산했습니다. 투표소까지 가면서 만난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투표소는 실내라서 그런지 온기가 돌았고 한가한 가운데 투표를 하는 주민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두 장의 투표용지에 기표한 뒤 색깔에 따라 투표함에 넣고 돌아서는데, 각기 다른 표정의 참관인 두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나라당 텃밭이라서 그런지 누가 어느 당 소속인지 글방 알아볼 수 있겠더라고요. 

 

 제18대 국회의원선거 투표확인증. 2천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확인증을 받으면서도 씁쓸했는데 저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18대 국회의원선거 투표확인증. 2천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확인증을 받으면서도 씁쓸했는데 저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조종안
제18대 국회의원선거 투표확인증. 2천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확인증을 받으면서도 씁쓸했는데 저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조종안

 

투표를 마치고 국·공립 유료시설에서 2000원 이내의 활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투표 확인증도 받았습니다. 투표확인증을 모금하여 선거법 올가미에 걸린 누리꾼들의 벌금납부에 활용하자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투표소에서 나와 장모님을 뵈러 갔습니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권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승패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상쾌하더군요. 전화를 주신 장모님과 강 기자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선거에서 '쿨'한 기권도 의사표현"이라고 주장하는 누리꾼들에게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말고 '쿨'하게 살 각오를 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투표를 독려했던 강 기자님!

 

당신과 장모님의 도움으로 저는 이번에도 빠지지 않고 제대로 찍었습니다. 그런데 성희롱으로 물의를 빚은 후보도 축하 받으며 당선되었네요. 그러나 누구 탓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선택했기 때문이지요.  

2008.04.11 10:44ⓒ 2008 OhmyNews
#18대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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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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