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연주 장면
민중의소리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교향악단 '할레(Halle)'가 영국 리즈의 '리즈타운 홀' 무대 뒤편에 올랐다. 1600명의 청중과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가 집중하고 있는 무대 중앙, 그곳에는 자기 앞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만큼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한, 소년에 가까운 열여덟 살의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40년 넘도록 세계 유수의 피아노 스타들이 꿈꿨던 '리즈 콩쿨 2006' 결선 무대에 오른 김선욱. 그의 손이 내리친 폭발적인 피아노 연주가 할레의 협연을 끌어당기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온 세상에 퍼뜨렸다.
이 무대가 담긴 동영상을 본 필자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에 매료됐다. 동영상 마지막 부분에는 협연 후 무대 뒤로 들어오면서 "어메이징(Amazing)"을 연발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나온다. 심사위원들의 생각도 지휘자와 비슷했는지 김선욱은 리즈 콩쿨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1위를 차지했다.
'늙은 취향'의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만나다'애늙은이!'연주를 다 들은 필자에겐 약간은 짓궂기도 한 이 단어가 떠올랐다. 김선욱을 만난 김에 '원숙함'의 원인에 대해서 캐물었다.
"워낙에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때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다들 어리게 입었는데 저는 갈색 구두에 주황색 셔츠, 회색 자켓을 입었어요. 지금도 무늬있는 옷은 안 입습니다. 단색 위주로 입죠. 물건을 살 때도 주위에서 저 보고 '늙은' 취향을 좋아한다고들 합니다."음악적 원숙함에 대해 물은 필자에게 김선욱은 약간은 동문서답 같으면서도 솔직한 답변을 했다. 곧이어 김선욱은 리즈 콩쿨에서 4위를 차지했던 외국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칭찬을 한다. 결선에서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 친구인데 롱 티보 콩쿨에서도 우승했던 실력자라고 한다. 이 친구의 연주가 너무 뛰어나서 자신이 1위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애늙은이' 김선욱도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감정조절이 안된다고 한다.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음악의 분위기 자체에 감정이 이입된다는 것.
김선욱은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기 보다는 '음악애호가'로 정의한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고 공연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자신을 그냥 음악애호가라고 생각합니다."임동혁, 손열음 등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 중에 라이벌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라이벌이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어도 저 사람과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연에 대한 리뷰나 기사도 전혀 보지 않는다고 한다. 주변에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좋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은 신경 쓰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간다고 한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자세. 어떻게 보면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기 보다는 '음악애호가'로 정의하고 있는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리라.
평소에 주로 듣는 음악은 클래식. 200년, 300년 전의 구닥다리 음악이지 않냐, 최근의 새로운 음악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김선욱은 "록도 듣고 현대음악 음반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편해지고 싶을 때 듣게 되는 것은 언제나 클래식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선호하는 음악은 확실하다는 것이 그의 해명. 그런 그도 국악은 아직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한번 관심을 가지면 완전히 파고들어가는 스타일이라면서 훗날을 기약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주는 협연무대가 좋아"독주회보다는 협연무대가 편합니다. 협연무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죠. 같이 연주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구요. 리허설하는 시간도 재미있습니다. 독주회를 준비할 때는 연주 전날까지 혼자서 연주해야 합니다. 외롭기도 하고 짜증도 나지요. 리즈 콩쿨 결선에서 연주했던 브람스 협주곡 1번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50대 50인 곡입니다. 혼자 돋보이려고 하거나 크게 치면 연주시간 50분이 걸리는 이 대곡을 끌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배려하고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오케스트라 악보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협연할 때도 지휘자와 눈으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