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영정친일화가 운보 김기창이 그렸다는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이 세종전 안에 걸려있다.
이성한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아이들을 데리고 '세종전'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세종전 안에는 조선조 제 4대 임금이신 세종대왕의 영정(초상화)이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들 어린 백성들을 소리 없이 맞아주고 계셨다. 가만히 가서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인데, 아뿔싸! 만원짜리 지폐 속에 그려져 있는 것과 똑같은 표정이다. 그러니까 저것은 대표적인 친일화가인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의 영정 초상인 것이었다. 속으론 불만이었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하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곳에서 세종대왕께서 집현전의 학자들과 각고의 연구와 노력 끝에 만든 위대한 우리 말, 우리 글-훈민정음-의 흔적과 자취를 만날 수 있었기에 값진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세종전을 돌아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글 창제 당시 한문을 무조건 숭상하고 중국을 섬기기에 급급했던 사대주의적인 많은 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로지 나라와 백성들의 이익과 편리를 위하여 정성과 슬기를 다해 한글을 만든 세종은 '혹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좌파 임금이었을까?'를 내 맘대로 상상해 보았다.
나는 다시 아이들과 함께 세종전을 나와서 참도를 걸으며 능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좌우로 우리들을 너그러이 크게 품어주는 산세의 흐름이 포근하고 편안하다. 나는 정자각에 이르자 기단의 장대석 위에 아이들을 참새들처럼 쪼르르 앉혀 잠시의 휴식을 가지도록 했다. 그리고는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과장하여 마치 틀림없는 것인 양 매우 진지하게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얘들아, 여기 잠들어 계신 세종대왕은 밀짚모자의 할아버지란다.""정말요? 진짜예요? 에이~! 거짓말이죠?""아냐, 사실이야. 나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세종의 둘째 형님)파의 후손으로 세종대왕은 우리 친할아버지의 동생이니까 나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인 거야!""와~아, 정말예요? 으음~ 안 믿어지는데…."나는 솔직히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족보에 대해서도, 몇 대 손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아이들에게 역사적 상상력(?)과 답사여행의 추억을 하나 쯤 남겨주겠다는 순진한 일념 하나로 우스꽝스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아이들이 나중에 철이 들더라도 내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후손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먼 친척 할아버지인 것만은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