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휴대폰에서 '연애'를 발견하다

닭살스런 사진에 문자... "엄마·아빠, 오래오래 사랑하세요"

등록 2008.04.24 13:22수정 2008.04.25 11:3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형제 중에 유일하게 혼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막내딸인 나에 대한 부모님의 걱정은 민망할 정도다. 잘 챙겨먹어 집에 있을 때보다 살이 쪄 걱정인데 집에 갈 때마다 엄마는 "얼굴이 반쪽이 됐다" 그러시니 민망할 수밖에.

 

엄마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내 손을 잡고 가만히 쓸어내시기도 하다가 갑자기 어려서도 먼저는 잘 하지 않던 뽀뽀까지 하셨다. 내가 '과제 많아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집에 안 갔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애잔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엄마의 휴대폰이 보였다. 지난 여름 내가 바꾸어드리곤 기계가 전에 쓰던 것과 달라 전화 외엔 사용하지 않으셨다. 막내딸 많이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사진이나 몇 장 남겨두려고 얼짱 각도로 자세잡고 확인버튼을 눌렀는데, 이게 웬 일? 저장 공간이 부족하여 사진을 저장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다.

 

전에 쓰던 휴대폰과 문자 자판이 달라서 어렵다며 문자메시지도 보내는 것도 안 배우시던 엄마였는데 사진 앨범이 다 찼다니. 엄마의 사진앨범에 들어갔다 난 다시 한 번 뜨악했다. 엄마와 아빠가 다정하게 찍은 셀카가 사진앨범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엔 휴대폰을 들어올린 아빠의 팔과 아빠의 어깨에 새침하게 기대있는 엄마가 있었다. 각도도 가지가지, 무표정에서 웃는 모습까지 젊은 세대의 컨셉사진 못지않았다.

 

엄마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아빠가 보낸 메시지가 전부였다. "퇴근길에 데리러갈테니 오늘도 수고하라"는 내용이었다. 깜찍한 이모티콘, 마지막에 '사랑한다'는 말과 보너스 하트까지. 내후년이면 결혼한 지 30주년을 맞는 50대 부부의 연애라고 하기엔 너무 달콤하다.

 

가족들이 다 모인 밤, 장난스럽게 이 얘기를 꺼내니 엄마는 "아빠랑 전에 속리산 놀라갔었는데 카메라를 깜박하고 안 가지고 가서…"라며 부끄러우신지 말꼬리를 흐리신다. 덕분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오늘 아침, 밥 먹여 보내야 한다는 엄마의 부르심에 일어났다. 부스스한 몰골로 식탁에 앉았는데 국을 뜨시는 엄마의 옷차림이 참 화사하다. "옷 예쁘네”라고 말했더니 언니가 "아빠가 사준 거야"라고 말한다. 엄마는 괜히 멋쩍었는지 "그냥 지나가다 산 거래, 비싼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이건 뭐, 아직 백일도 되지 않은 20대 딸의 연애는 저리가라다. 30년은 족히 넘겼을 우리 부모님의 승리다. 살랑살랑거리던 옷자락처럼 엄마의 마음에도 다시 봄바람이 불어오는 거라면 좋겠다.

 

"엄마 아빠, 예쁘게 오래오래 사랑하세요!"

2008.04.24 13:22ⓒ 2008 OhmyNews
#봄바람 #부모님 #연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 4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일본군이 경복궁 뒤뜰에 버린 명량대첩비가 있는 곳
  5. 5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