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의 막내딸 조의정씨가 펴낸 요리책 <엄마처럼>.
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내가 최근 만난 요리책 한권도 '맛은 추억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허영만 음식 테제'에 아주 충실하다. '쉽게, 맛있게, 따뜻하게 차린 밥상'이란 부제를 단 <엄마처럼>(조선일보 생활미디어)이란 책이 그것이다.
수필 제목 같은 요리책 <엄마처럼>의 저자는 조의정(57)씨다. 아마도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부친의 이야기를 꺼내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조씨는 '진보당사건'으로 잘 알려진 죽산 조봉암의 막내딸이다. 죽산은 그가 9살 때 '술 한잔 못하고 담배 한 대 못피우고'(당시 죽산의 죽음을 보도한 기사의 제목)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조씨는 자신이 역사적 인물인 조봉암의 딸이라는 데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엄마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이신우콜렉션 디자인실장 등으로 활약했던 그가 <엄마처럼>을 펴낸 것도 그런 소박한 바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자신의 요리를 먹어보고 결혼을 신청한 남자과 결혼했다는 조씨에게 맛과 음식은 '기억'이고 '추억'이다.
"기억에 아름다운 색칠을 한 것이 추억이라면 나는 너무 오래 묻어두었던 어릴 적 추억을 할머니의 손맛을 더듬이며 되찾았다. 맛나고 아름다운 추억이 거기 그렇게 깊숙이 박혀 있었구나. 호로록호로록 넘어가던 고소한 잣죽 같은 추억, 살얼음 낀 식혜처럼 달콤하고 시린 추억들이 음식을 만드는 내내 예고없이 찾아와서는 자꾸만 손을 멈추게 했다. 누구는 후각이 기억을 가장 잘 되살리게 한다지만, 내게는 입 안에 감도는 맛들이 나를 기억 속으로 이끌었다. 그때 내가 삼킨 것은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고 우리 가족의 문화이고, 조선사람의 역사였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다." 여름에 먹는 낭만만두 '규아상'을 들어봤나?<엄마처럼>은 강화도출신 할머니와 평안도출신 시어머니의 손맛이 골고루 담겨 있다. 책에서도 '할머니 밥상'과 '어머니 밥상'이 중요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할머니와 시어머니는 요즘 유행하는 '전통 슬로푸드'(slow food)의 대가라고 할 만하다.
여기에다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손맛을 새롭게 종합(fusion)시킨 듯한 '저자만의 밥상'이 보너스로 펼쳐진다. 관자스테이크나 통족발김치찜, 쇠고기아스파라거스말이, 간장대하장, 파육개장 등이 '50대 신세대 엄마'가 주는 맛있는 보너스다.
조씨의 손맛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할머니였다. 서른 셋에 과부가 된 할머니는 "집 안팎의 대소사를 모두 진두지휘하시는 여왕이고 장군"이었다. 메밀·청포묵, 오이·애호박·가지·무·숙주·시금치나물, 병어·조기조림, 모시조개냉이된장국 등 할머니의 밥상은 익숙해서 정말 따뜻하다.
특히 삼색달걀조림, 흰살생선말이, 준치맑은국, 굴깍두기 등에 이르면 입안에 고이는 침을 막을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