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총을 들었다

[어느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①] 휴교령은 떨어지고 시위에 처음 참여하다

등록 2008.05.08 10:43수정 2008.05.0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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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말]
 지금은 서석중학교 건물로 바뀌었지만 80년 당시엔 광주 서석고 건물이었다.
지금은 서석중학교 건물로 바뀌었지만 80년 당시엔 광주 서석고 건물이었다.임영상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도중 최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후 무려 18년간이나 계속되어 왔던 장기집권도 막을 내렸다. 그동안 얼어 붙어 있던 정치권은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이했고, 민주화의 꽃도 필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국무총리에서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간접 선거인 '체육관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은 갑작스레 대권을 넘겨 받아서인지 민주화 일정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아니,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맡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수사 과정을 거치면서 실질적인 군권을 장악하고 대권을 거머쥐기 위한 절차를 밟아가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최규하 대통령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정치군인들, 이른 바 '신군부'가 정권인수인계절차를 자신들이 만든 시나리오대로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재야 인사였던 김대중 선생과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비롯한 야권에서는 거의 매일 투명한 정치 일정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해를 넘기고 1980년 봄이 되어도 여전히 혼미정국이 계속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봄이 왔으되 봄이 아니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어울렸다. 시민과 학생들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을 비난하며 연일 격렬한 시위를 계속했다.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5월 중순에 이르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소강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나 광주는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광주 서석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던 나는 신문·방송 등 언론매체를 통해 전국의 시위 상황을 접할 수 있었다. 서석고는 광주시 외곽 지역인 화정동에 있는 신생학교였다. 지금이야 농성동과 화정동 일대가 광주의 중심 지역으로 바뀌었지만, 1980년 당시만 해도 초여름 모내기철이 되면 학교 담장 너머 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에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만큼 변두리였다.


나는 학교 근처인 농성동에서 하숙을 했다. 하숙집이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광주 지역 시위는 함께 하숙했던 대학생 형이나 대학가 근처에 살고 있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들을 수밖에 없었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5월 17, 18일 시위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시위 구경하다 군인한테 죽도록 얻어맞았대"


1980년 5월 19일 아침. 평소처럼 등교했다. 교실에 들어가니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렸다.

"○반 애가 학교 파하고 시내에서 시위 구경을 하다가 군인한테 붙잡혀 죽도록 얻어맞았다."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 갔다가 시위 대열에 합류해 시민들과 함께 돌멩이와 벽돌 조각을 집어던지며 군인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시위에 참가한 여대생들이 대열 뒤편에서 돌과 깨진 벽돌을 날라다 주면서 열심히 시위를 돕고 있는 것을 보니까 가슴이 뭉클하더라."

"전남대가 있는 용봉동에서는 군인들이 집집마다 수색하여 젊은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갔다. 어떤 사람은 잠을 자고 있다가 대학생처럼 보이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갔고, 어떤 대학생들은 자취방에서 시위와 무관하게 밥 먹고 있다가 끌려가기도 했다."
"광주공원에는 시위하다 계엄군들에게 붙잡힌 여대생들이 발가벗겨진 채 잡혀 있다."
"공수부대원들이 시내 곳곳에서 대검과 곤봉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상하고 있다."

친구들의 대화는 온통 어제 광주 시내에서 벌어졌던 시위와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시위 때문에 단축수업을 했다. 평소 때보다 훨씬 이른 오후 4시쯤 수업이 끝났다. 나는 친구들이 말한 '격렬한 시위'를 직접 보기로 했다. 책가방을 집에 던져놓고 교복을 입은 채 금남로 4, 5가와 맞닿아 있는 대인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현 광주은행 본점) 부근까지 갔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눈앞에서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 작전이 자행되고 있었다. 군인들과 시위 학생들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전남도청 앞 금남로의 '전선'은 맥없이 무너진 후였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도망가고 쫓는 광경을 목격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대검과 곤봉을 휘둘렀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인동 터미널 옆 대한극장(현재 롯데백화점 옆 금남상가타운) 골목 쪽에서 주변의 상인들과 금남로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학생들을 쫓던 군인들이 골목에서 지켜보던 우리를 발견했다. 그리곤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무섭게 달려왔다. 이제 군인들은 시위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분하지도 않았다. 어깨에 총을 대각선으로 메고 긴 곤봉을 손에 든 채 코를 씩씩거리면서 쫓아왔다.

나는 너무 놀라 술집이 많은 좁은 골목길로 도망갔다. 함께 구경하던 시민들도 반사적으로 도망갔다. 허름하게 보이는 여인숙에 한참 동안 숨어 있다가 구경도 좋지만 큰일 나겠다 싶어, 4㎞ 정도 거리에 있던 농성동 하숙집까지 단숨에 가버렸다.

5월 20일. 광주시내 초·중·고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진 모양이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 앉아 있는데, 교실 앞쪽 천장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무겁게 흘러 나왔다.

"학생 여러분, 지금 전남대가 있는 용봉동과 조선대가 있는 서석동 등 대학가와 도청앞 등에서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위 와중에 시민들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심하게 다쳤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하여 수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오늘 오후부터 휴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학교에서 등교하라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집에서 자습과 복습을 하면서 기다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대학가와 시내는 절대로 나가지 말 것을 당부드립니다."

교문을 나서는데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교문 양옆으로 서 계셨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선생님들은 교문을 나서는 우리들에게 몸조심하라고 거듭 당부하셨다. 벌써부터 교문 앞에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와 계셨다.

 5.18 당시 시위대들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5.18 당시 시위대들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5.18기념재단 자료사진

드디어 친구들과 농성동 시위에 참가하다

하숙생들과 점심 식사를 한 후 방에서 쉬고 있는데,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2층 옥상에 올라가 광천동쪽 공단 입구인 농성동 로터리를 바라봤다. 하숙집과 농성동 로터리까지는 직선으로 2백여m 밖에 되지 않았다. 농성동 로터리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용봉동과 지산동 등 대학가와 전남도청 앞 금남로 등지에서 벌어졌던 시위가 이제 시 외곽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하숙집 동료들과 농성동 로터리에 갔다.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로터리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어림잡아 1천 명도 넘게 보였다. 시위대 차들이 '㈜아시아자동차'가 있는 광천동 쪽에서 우리가 있는 농성동 로터리 쪽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잠시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곧바로 시내 쪽으로 가는 길인 돌고개 방향으로 이동했다.

시위대원들이 광주의 중심가인 도청 앞 분수대광장과 금남로로 가기 위해서는, 돌고개를 거쳐 양동시장을 지난 뒤 금남로 끄트머리인 유동 3거리(지금은 4거리로 변함)에서부터 금남로로 진입해야 했기 때문이다(지금은 농성동 로터리에서 새로 뚫린 상록회관 옆 넓은 도로를 통해 금남로 진입이 가능하다).

시위대 차에 탑승한 시위대원들은 각종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유리창은 다 깨지고 차체만 남은 버스를 각목으로 두드리면서 지나가는 시위대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로변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한참 동안 박수를 보내면서 심정적으론 벌써 시위에 동참하고 있을 때였다.

"영상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학교 친구인 한광희였다. 버스 안에는 이승진, 윤인호, 이종언 등 다른 친구들도 있었다. 언제 시위대 버스에 올라탔는지 빠르기도 했다.

"야, 어디 갔다 오는 거냐?"
"아시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현재 기아자동차 광주공장)는 광주에 있는 방위산업체로 군용트럭과 장갑차 등 군수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일반버스는 물론이고 상용트럭, 군용트럭과 장갑차 등 여러 종류의 차들이 완성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과 몇 마디 주고받고 차에 타려고 하는데 시위대 버스가 멈추지도 않고 그냥 떠나 버렸다. 친구들과 합류하지 못한 나는, 뒤따라 온 시위대 버스에 잽싸게 올라탔다.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이 버스의 차체를 각목으로 두들겼다. 북이 된 차체는 박자를 맞추는데 제격이었다. 우리 차도 먼저 지나간 차들처럼 개사한 '훌라송'을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전두환이 물러가라 물러가라. 전두환이 물러가라 물러가라. 전두환이 물러가라. 전두환이 물러가라. 전두환이 물러가라."

이 노래가 끝나면 "김대중을 석방하라"로 바꿔 부르면서 시내를 질주했다. 당시 권력의 핵심으로 여긴 전두환과 신현확에 대해서는 "물러가라"였다. 하지만 호남인의 '한'과 '희망'의 상징이었던 김대중의 구속에 대해서는 "석방하라"였다.

양동시장 상인들의 주먹밥 지원, 시위대는 "으슥으슥"

시위대원들은 또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 '투사의 노래' '애국가' '진짜 사나이'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의 노래를 번갈아 가며 불렀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일반 국민들에게도 널리 불려지는 대중성 있는 운동가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노래들이 시위 현장에서 애창곡이 됐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던 군사정권의 영향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했으면서도, '진짜 사나이'란 군가를 부르면서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시위를 했다.

시위대 차들이 시내를 질주하고 다닐 때 주요 도로변 상가의 상인들과 시민들이 음료수 박스와 김밥, 주먹밥을 차에 가득 실어 주었다. 특히 양동시장을 지날 때면, 시장 아주머니들이 차를 세운 뒤 주먹밥을 전달하고 격려해 시위대원들의 사기를 한껏 드높였다. 시민들은 5월 17일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쓸데없이 소란을 피운다고 질타했고, 시위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며 냉소를 보냈었다. 그런데 최근 며칠 사이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을 직접 목격한 후부터는 모두가 한 뜻이 되어 뭉쳐 있었다.

시위대 차들은 광주 시내 주요도로를 따라 몇 바퀴 돌았다.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시위대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시위대원들은 계엄군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항공 사진을 찍고 주요거리에 숨어서 사진 촬영을 하여, 시위가 진정되면 색출해 처벌한다는 소문을 듣고 후환이 두려워 복면을 한 것이었다.

시위대원들이 얼굴을 가리고 유리창이 깨진 버스와 '노획한' 군 지프에 모래 주머니를 싣고 시내를 질주하는 광경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가끔 본 중동의 게릴라와 흡사했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덧붙이는 글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5.18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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