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검당 안 일로향실. 남명 스님께서 거처하던 곳이다.
안병기
내가 처음 순천 선암사에 간 것은 80년대 초였다. 그 때 나는 몇 달째 무전여행 중이었다. 초파일 전날, 공교롭게도 난 전남 순천 시내를 지나가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나서 그 대가로 설거지를 해줬다. 그리곤 그 날의 숙박 예정지인 선암사를 향해 걸어갔다. 숙식을 대개 절집에서 해결하곤 했던 것이다.
5월 초긴 했지만, 몹시 무더운 날씨였다. 걷기가 몹시 팍팍했다. 지나가는 분을 붙들고 "선암사까지 얼마나 가야 하느냐"라고 물었더니 걸어서는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기 힘들 거라고 한다.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태워달라고 무작정 손을 들었다. '도보여행'이라는 원칙을 깬 것이다.
차를 몇 대나 지나친 끝이었던가. 겨우 봉고 트럭을 얻어 탔다. 마침 선암사로 가는 차를 잡았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운전석 옆엔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짐칸에 타야 했다. 짐칸엔 무언지 모를 화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발밑이 물컹거리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뭘까.
조금 있으려니, 하얀 포대 속에서 핏물 같은 것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기겁을 하고 놀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차에서 내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짐칸에 실었던 것은 초파일에 선암사에 오는 대중들이 공양할 돼지고기였던 것이다.
1981년, 순천 선암사에서 겪었던 초파일 선암사엔 우리보다 먼저 어둠이 도착해 있었다.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에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아침에 일어나 막 세수를 하려는데 누가 불렀다. 늙은 중이 오늘 하루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 했다.
'남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이 스님은 붓글씨 잘 쓰기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었다. 그의 글씨를 받고자 전남·광주뿐 아니라 서울에서까지 손님이 찾아올 정도였다.
온종일 먹을 갈고 차를 끓이고, 손님들이 놓고 가는 사례비를 장부에 기재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틈틈이 공양간에 가서 스님의 '일용할 양식'인 곡차를 가져오기도 했다. 붓글씨 한 폭 쓰고 나면 곡차도 한 잔이었다. 글씨를 쓰려고 곡차를 마시는지 곡차를 마시려고 글씨 핑계를 대는지 알 수 없었다.
더는 손님들이 오지 않는 저녁 무렵. 스님과 단둘이만 남게 되자, 술이 얼큰해진 스님은 내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 의사였던 그는 서독으로 유학보낸 부인이 돌아오기를 10년이나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림이 덧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늦깎이로 입산하고 만다.
세수 일흔여섯 살. 그만큼 늙었어도 상처를 지우지 못했던 걸까. 자신을 배신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남명 스님은 늙은 거위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울음이 진정되고 나자, 이번엔 나를 대중이 앉아노는 만세루로 끌고 갔다. 함께 춤을 추자는 것이었다. 내가 끝끝내 거절하자, 그는 홀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춤 한 마당에 마치 서럽고 안타까운 생을 사위기라도 할 듯이.
곡차를 즐기는 스님. 계율을 의식하지 않는 무애행. 반면에 동양학에 대해 놀라울만치 박식한 스님. 남명 스님과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와 보낸 1981년 초파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인상 깊고 잊지 못할 석탄일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나 세월이 흘러간 재작년, 난 오마이뉴스에 '첫사랑, 아홉 그루의 영산홍으로 다시 피다'라는 제목으로 남명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기사가 나간 지 일년이 지난 작년 4월, 뜬금없이 '김태범'이란 분에게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쪽지가 날아왔다.
'남명스님과의 깊은 인연의 글 잘 읽었습니다. 남명스님께서는 8, 9년 전 울진 신계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입적하시기 전에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목우사에서 스님의 상좌이신 철우(도선)스님과 계셨구요. 저도 거기서 남명스님 뵙고 글도 얻었습니다. 어제도 도선스님과 남명스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목우사에는 남명스님이 남기신 많은 글과 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5월 27일 남명스님 기일에는 목우사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몇번 쪽지를 주고받은 끝에 김태범이란 분과 통화했다. 그 분은 내게 "남명 스님은 좌탈입망(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 하셨어요" 라고 말했다.
남명 스님이 한낱 땡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게 마치 나 자신의 명예라도 되찾은 듯이 기뻤다. 목우사 철우 스님과도 통화했다. 이렇게 남명 스님의 존재가 잊히지 않고 있다는 건 그의 현생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언제가 기회가 오면 목우사에 가서 그가 이 세상에 떨구고 간 삶의 부스러기들을 돌아보고 올 참이다.
그 밤 선묘 낭자가 지은 '불전'에서 날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