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께쉬의 길거리에서 만난 돈에 유유자적, 미소 지을 수 있는 이 분의
넉넉한 포스가 매우 유쾌하게 다가왔다. (사진·글: 박경내)
박경내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나는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는 양식도 크게 달라졌다. 틈만 나면 만사 제쳐놓고 여행부터 떠나려는 경향이 어느새 삶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듯하다. 불경기니, 고유가 시대니 떠들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연휴 때가 되면, TV는 몇십 만명이 공항을 빠져나갔노라고 소식을 전해준다. 그럴 때마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것을 뉴스랍시고 전해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슬며시 궁금해지곤 한다. 설마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떠나는데 당신은 왜 미적거리면서 방 구들만 지고 있느냐?"라고 힐난하는 건 아니겠지.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블로그나 또 다른 사이버 공간을 통해 마구 여행기를 쏟아낸다. 언젠가 어느 사이트에선가 읽은 듯한, 천편일률적이며 상투적이기까지 한 수많은 글들. 풍경이라는 객체에 대한 서술은 있지만, 그 풍경을 해석하고 인식하는 나라는 주체가 느낀 감상은 빠져 있는 글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뭣 때문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그 멀리까지 갔던 것일까?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라는 M.프루스트의 말은 매우 유효적절한 지적처럼 보인다. "여행은 스스로에게 자신을 다시 끌고 가는 하나의 고행이다"라는 알베르 카뮈의 말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가보지 못했다. 해외여행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 세태에서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셈이다. 이것은 "나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일까? 아니면 '우물 안 개구리'가 겪어야 하는 치명적 소외일까? 어찌됐든지 간에 난 당분간 해외여행이라는 걸 떠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내가 태어난 이 강산을 한 마리 코끼리에 비유한다면 죽어라고 발품을 판다한들 코끼리 발톱도 만지지 못한 채 생을 마칠 판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얼어 죽을 해외여행 따위를 꿈꾼단 말인가.
그렇다고 날 대책 없는 국수주의자로 판단하진 마시기 바란다. 이 강산을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게 우선이라는 얘길 조금 과격하게 한 것 뿐이니. 세계를 내 나름대로 바라볼 안목이 생기면 그때 가서 한 번쯤 물 건너로 떠났다 올 생각도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리 많은 곳을 돌아볼 생각은 없다. 페루의 마추픽추나 인도 등이 현재 내가 상정하고 있는 해외여행지의 전부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회고록 <추억> 속에서 "돌들의 배꼽, 자부심에 가득 차 있는 높이 치솟은 세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도 소속되어 있는 그 버림받은 세계의 한가운데 서서 나는 자신이 무한히 작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쓴 마추픽추에 오른 소감을 읽었던 적이 있다. "자신이 무한히 작다"라는 걸 느끼는 건 우리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어본 해외여행 소감은 이와는 딴판이었다. 자신이 지닌 자아의 크기에 비해 "대한민국은 무한히 작다"라는 자기 비하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할 수 있다. 아무튼, 마추픽추 등정 이후, 네루다의 작품활동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여행지라면 살아 있을 때 한 번쯤 가볼 만하지 않겠는가.
내가 인도에 가고 싶은 이유 그렇다면 남은 한 곳, 인도는 왜 가고 싶은가. 사이버 상엔 인도 여행기로 넘쳐난다. 비 온 뒤에 돋아나는 죽순도 그 속도와 물량을 따라가기 차마 버거울 정도다. '이러다 혹시 인도에 가기도 전에 먼저 식상부터 하고마는 건 아닐까?'라는 기우가 슬며시 고개가 들 정도다. 인도여행에는 문명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탈문명'이라는 허위의식도 들어 있는 듯하다. 미안하다, 인도를 소재로 쓴 숱한 여행기여. 난 나 자신만의 인도에 대한 '순결'을 지키기 위해 너희들을 거들떠보지 않으련다.